[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왕국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왕국


고구려 말기 동아시아 지도[고구려 말기 동아시아 지도]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고구려유민 이정기李正己 제나라

안사지란安史之亂은 당나라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가르는 분기점에 해당한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후 당나라 역사는 실질적인 무력을 지닌 절도사節度使들의 각축전으로 점철됐다. 절도사들이 장악한 각 번진은 독립왕국이나 다름없었다.


주목할 인물은 산동 일대에 근거지를 둔 고구려유민 출신인 평로 절도사 이정기다. 고구려가 패망한 지 반세기가 넘는 서기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고구려 패망 당시 당으로 끌려간 20여만 명(고구려유민)의 후손일 공산이 크다. 그에 관한 기록은 안사지란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멸망 당나라 고종[고구려 멸망]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신당서에 따르면 그는 내종사촌 후희일과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의 비장으로 복무했다. 난이 한창일 때 후희일은 안동도호 왕현지와 공모해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안록산의 심복 서귀도를 죽인 뒤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추대했다.


왕현지의 병사로 조정이 그 아들에게 절도사직을 세습시키려고 하자 이정기가 왕현지의 아들을 죽인 뒤 후희일을 평로군사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었다.


당나라 위박진 안록산 사사명 진격로[당나라 위박진]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안사의 난 당시 안록산과 사사명의 진격로)

(가운데 빨간 원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위박진의 위치)


서기 761년, 안록산 군대의 반격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후희일이 이정기와 함께 근왕군 2만 명을 데리고 발해만을 거쳐 등주로 상륙했다. 평로군이 인근 청주에서 관군과 합류하자 조정이 후희일을 평로치청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치주와 청주 등 6개주를 광장케했다.


그러나 이후 후희일이 정사에 무지하고 토목공사를 무리하게 진행하면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정기의 인기가 높아졌다.


서기 765년, 후희일이 이정기를 해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후희일을 쫓아내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조정은 본명이 회옥인 그에게 정기라는 이름을 내린 후,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에 임명하면서 요양군왕에 봉했다. 이정기는 세력을 확장해 산동 일대 10개 주에 10만 대군을 거느리면서 하북3진을 웃도는 세력을 형성했다. (제나라 시작)


고구려유민 제나라 영역[제나라 영역]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자치통감은,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고 기록해 놓았다. 이후 이정기는 이웃 번진과 혼인관계를 통해 연합전선을 형성한 뒤 독자세력으로 존재했다.


서기 777년, 이영요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요충지인 서주 등 5개 주를 점령해 최대 군벌세력으로 성장했다. 서주는 초한전 때 초패왕 항우의 도성인 팽성이 있던 곳으로 남북과 동서를 잇는 조운의 요충지다.


대운하의 조운에 생명선이 달린 당나라의 숨통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그는 청주에 있던 치소를 운주로 옮기면서 청주를 아들 이납에게 맡겼다.


당나라 관군 진격. 제나라 멸망[당나라 관군 진격]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서기 780년 3월, 덕종이 하북3진의 세력이 약화한 틈을 타 변주에 성을 축성해 이정기의 남진을 억제했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해에 변주와 가까운 조주에 군사를 집켤시킨 후 사촌 형 이유에게 서주자사를 맡긴 뒤 증원군을 파견했다. 이정기의 군사가 연전연승을 거둬 조운이 다시 끊겼다. 이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신당서는 당시 이 지역의 정사가 엄정해 부세도 가벼웠다고 기록해 놓았다. 당시 그가 다스린 15개 주는 지금의 산동 일대와 안휘 및 강소 일부를 포괄한 방대한 지역이었다.


인구도 84만 호에 이르렀다. 대략 540만 명에 달한다. 781년 8월, 그는 등창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때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의 양숭의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사하는 등 주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 와중에 서주자사로 있던 이유 등 일족이 당에 투항하면서 대운하가 1년 만에 재개됐다.


당나라 이희열 동상[당나라 이희열 동상]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이듬해인 782년, 이납이 회서의 이희열과 협공을 펼쳐 변주를 재차 장악하자 조운이 다시 끊겼다. 덕종이 급히 광동의 영남 지역까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선무절도사 유현좌를 내세워 이납을 치게 했다.


이런 무리한 군사동원에 이어 불공정한 논공행상으로 인해 이듬해인 783년에 장안 서북쪽에서 이납을 치기 위해 출병 중이던 경원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다. 덕종이 황급히 양주 등지로 몽진하면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이납을 제왕에 제수했다.


9년 뒤인 792년, 제왕 이납이 병사했다. 당시 34세였다. 이정기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지 12년 만의 일이다. 덕종은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정업무를 폐했다. 뒤를 이은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염전을 둘러싸고 하북3진의 일원인 성덕군과 갈등을 빚었다.


806년, 이사고가 죽자 이복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이때 마침 같은 장안에서는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헌정 이순이 즉위했다. 이게 이사도에게 치명타로 작용했다. 하북3진을 포함한 주변의 군벌이 조정의 이간책에 넘어갔다.


814년, 헌종이 이사도 손에 들어간 회서를 쳤다.


이사도 황제 권력을 누리다[이사도 황제 권력을 누리다] [이정기 제나라 역사] 고구려 유민, 당나라 절도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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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대십국지, 신동준, 학오재, 저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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