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제 망국의 군주 고위 그리고 숙비 풍소련 [98화]

위진남북조 시대, 오랜 전란으로 전통 귀족들이 주살 또는 도륙을 당해 세가 약해졌으나, 부를 많이 축적한 이들의 권세는 오히려 강해졌다. 고위는 화사개 같은 은행들을 통해 자신도 많은 부를 축적했다. 또한, 고위는 목황후의 시비였던 풍소련을 총애해 항상 그녀와 함께 다니며 사치를 일삼았다. 후세의 사가들이 북제는 풍숙비 때문에 망했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북제 후주 고위의 황후 - 목황후 풍숙비(풍소련)

 

무평 2년(571),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의 음란행위가 드러났다. 승려들을 총괄하던 사문통 담헌과 통정했던 것이었다. 고위는 처음 어머니의 이런 일탈 행위를 믿지 않았으며, 호태후 근처의 여장 비구니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호태후 근처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그녀를 고립시켰다.

두 명의 황후

무평 4년(573), 위진남북조 시대 북제의 명장인 곡률광의 딸이자 황후인 곡률씨를 폐하자 호태후는 권력을 다시 잡고자 오빠 호장인의 딸을 황후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고위의 유모인 육령훤은 자신과 친했던 고위의 태자 고항의 생모 목소의를 황후로 세우고자 했다.

"어찌 사내아이를 낳아서 황태자로 삼고서 자신은 비첩이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에 고위는 호씨를 좌황후, 목씨를 우황후로 삼았다. 술수가 뛰어났던 육령훤은 호태후 오빠의 딸인 호씨 좌황후를 내쫓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호태후에게 이런 말을 했다.

"황제에게 말하길, '태후의 행동이 대부분 법도에 맞지 아니하여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카인 좌황후가 고모인 자신을 음해했다고 믿어버린 호태후는 호황후의 머리를 깎고 내쫓아 육령훤의 의도대로 황후는 목씨가 차지했다. 당시 북제 조정은 황제다운 황제의 부재로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풍숙비 풍소련 그리고 북제 황제 고위

무평 5년(574), 고위는 목황후를 위해 구슬로 된 차미와 속옷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구슬이 부족했던 것이 이유였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북주의 질로태후가 병사하자 조문을 보낸 사신에게 구슬을 사 오도록 해 결국 완성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목황후에게 질려 숙비 풍소련을 총애했으니 그녀가 위진남북조 시대 북제의 마지막을 끌어낸 풍숙비이다.

 

 

고위는 풍소련의 몸매를 혼자 감상기 아까워 나체로 조당에 눕혀놓고 대신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풍소련은 비파를 잘 타고, 가무에도 능했다고 한다. 고위는 늘 그녀와 함께한 까닭에 밖으로 나갈 때도 함께 말을 타고, 늘 생사를 함께할 것을 기원했다고 한다.

북주 vs 북제 - 하음, 평양 대전

무평 6년(575), 북주가 하음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황제는 무제 우문옹, 우문태의 넷째 아들)

낙양 북쪽으로 이미 북제는 관중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당시 북제는, 단 5년 만에 곡률광이 다져놓은 관중 진출로를 모두 상실했다, 관중에 대한 영향력은 모두 상실한 상황, 위협할 만한 요충지조차도 다 빼앗긴 상황이었다.

 

이후 전쟁은 지속하여 우문옹이 진주로 친정에 나서 울상귀와 병사 8천 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 당시 북제 변경에선 급보를 여러 번 보냈으나 간신 우승상 고아나굉이 이런 말을 하며 번번이 고위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황제께서는 바로 즐기시는 중이고 변방에서 일어난 작디작은 전투는 바로 일상적인 일인데, 어찌 긴급히 상주하여 보고하는가!"

그런 고아나굉도 평양이 함락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고위에게 알렸다.

이때 풍숙비는 사냥을 떠나자는 말을 했다. 망국의 군주답게 고위는 진주를 버려두고 사냥을 떠났다.

"한 번 더 사냥하는 게 어떻습니까?"

대군을 이끌고 진주로 가는 대신 풍숙비와 마저 사냥하기 위해 삼퇴에 머물렀다. 그 사이 홍동과 영안이 함락되었고 분수 일대까지 북주군이 진격해서야 사냥을 끝내고 친정에 나섰다. 기주 일대의 기름진 평야를 보유한 북제가 안으로 곪아갈 때 북주의 군대는 끊임없이 북제의 변방을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ps. 고위와 고작의 일화

고위의 이복형제이자 정주자사인 남양왕 고작은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했다. 하루는 부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아이를 빼앗아 개에게 먹였고, 그 피를 부인에게 발라 개가 부인까지 잡아먹게 하였다. 그러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문선(문선제, 고양) 백부의 사람됨을 배우겠다."

고위는 이 소식을 듣고 쇠사슬로 매어 소환했지만, 그는 고작과 고작, 잔인한 놀이에 대한 아이디어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갈을 잡아 목욕통에 벌거벗은 사람과 함께 넣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며 깔깔댔는데, 고위는 고작에게 이런 아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처럼 즐거운 일을 어찌 역마役馬로 급히 상주하여 알리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북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대신 양음 등이 정무에 소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음은 고양의 신뢰를 받았으나 그도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술에 취한 고양이 그를 관에 넣고 산 채로 묻어버리려 했었지만 만취한 그가 정신을 잃자 가까스로 살아났다.

 

이런 엽기적인 일이 위진남북조 시대에 흔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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