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 양견(수문제) 한나라의 조조가 되다! 위지형, 사마초난, 왕겸 제압 [102화]

만화 표인 속 양견 - 상주국대장군 좌대승상 양견

수나라 양견의 탄생 설화

서위 대통大統 7년(541) 6월, 풍상馮翔(섬서성 대려현)의 반야사般若寺에서 양견(수나라 문제, 수문제)이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절 주위에는 자색 기운이 감돌고 상서로운 구름이 뒤덮었다는 류의 진룡천자 전설이 전해진다.

- 머리에 뿔이 자람
- 몸에 비늘이 있음
- 콧대가 정수리까지 통함
- 눈에서 빛이 남
- 손에는 문文자 손금
-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음
- 표정엔 위엄, 말과 웃음에 구애받지 않음

아마도 생모 여씨呂氏의 출신이 비천했기에 이런 가공하고 포장한 전설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양견은 15세에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차기대장군에 임명되고 현공에 봉해졌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무제 이후로 두각을 나타냈던 양견은 마침내 장녀를 무제의 황태자비로 삼았다. 황태자는 보위를 이은 북주 선제에 해당한다.

수나라 문제 양견 _ 독고황후

 

북주 최고 권력자가 되어가는 양견

북주 무제 건덕 4년(575), 양견(수문제)은 3만의 수군으로 황하를 건너 북제 토벌전에서 활약하였다.

 

북주 무제 선정 원년(578), 무제가 사망하고 선제 우문빈이 보위에 오르니 외척 양견(수문제)의 지위도 점점 높아져 대전의라는 최고관에 올랐다. 그러나 무절제했던 선제는 재위 2년 만에 사망하고 7살인 우문연이 보위를 이으니 이가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마지막 황제인 정제다.

 

선제는 생전에 양견의 권세가 강해 그에게 실권을 주지 않으려 했으나 정역 등이 선제의 유조를 위조해 양견은 실권을 쥐게 되었다. 이에 훈귀에 속하는 무장들은 군대를 일으켜 양견 타도를 외쳤다. 선제의 유조에 고명대신으로 이름이 올랐지만 이를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린 북주 황제 우문연(천)
정권을 장악한 대장군 양견 (수문제)
훗날 수나라를 세우는 양견 (수문제)

위지형, 사마초난, 왕겸의 반란

북주 정제의 대상 2년(580), 북주의 선제가 죽고 양견이 집정에 오르자 옛 북제 영토의 중심지역을 평정하고 있던 위지형은 양견에게 북주 찬탈의 의도가 있다고 보고 양견 타도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 위지형도 일찍부터 주국대장군의 지위에 있던 위진남북조 시대 부병군단의 거물이었다.

만화 표인 속 위지형

 

우문태 누이의 아들로 무장으로선 양견의 부친 양충과 같은 연배인 노장이기도 했다. 위지형은 촉을 토벌하는 대공을 세웠고 선제 즉위 후 대전의라는 고관이 되었지만 양견이 권력을 쥐자 상주총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마저도 양견 일파인 위효관에게 빼앗기자 자신의 부병 군대를 이끌고 거병했다. 북주 종실을 받들어 산동성 일대를 근거로 하여 돌궐, 진陳과 연결해서 군사적 활동 범위도 넓혔다.

위지형, 사마초난, 왕겸의 거병 일대

7월, 정제 사마황후의 부친인 사마초난은 고환의 사위로 운주 총관이었으나 호북에서 거병하여 위지형에 호응하였다.

 

8월, 익주총관 왕겸은 양충과 같은 연배인 왕웅의 아들로 현지 성도에서 거병하였다. 하남, 산동, 호북, 사천에 걸친 넓은 일대에서 양견을 반대한 것이다. 양견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군벌을 대표하는 위효관, 원훈의 한 사람인 병주 총관 이목이 그의 편이었었다. 양견은 정역과 유방 등을 장군으로 삼아 출병토록 했으나 둘 다 핑계를 대어 출전하지 않아 훗날 실각한다.

 

한편, 사마초난은 8월에 형세가 불리하다 보고 남조 진에 망명하였다.

10월에 위지형은 업성에서 위효관에게 패하여 자살했고, 왕겸도 패배한 뒤 목이 베였다.

12월, 드넓은 지역에서의 반란은 10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양견은 상국, 왕위에 오르고 구석의 예를 받는다. 선양을 받기 위한 형식을 밟아간다.

 

위지형 대장군의 업성(북제 수도) 방어 실패 이후 양견은 사실상 황제의 위치에 오르게 됨

돌궐과 북주(수나라)

이 시기, 북방엔 수나라 하나였기에 수문제 양견은 이전과는 다르게 돌궐의 사신을 박대한다. 북제가 존재할 땐 돌궐과 힘을 합쳤지만 북제가 사라진 당시, 그들과 힘을 합칠 이유가 없었다. 돌궐은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보녕을 제압하고 그 영토를 취한다. 그리고 수나라의 주군 풍욱, 난주총관 질리장차, 상주국 이숭, 달해장유 등을 잇달아 격파하곤, 무위군, 천수군, 안정군, 김서군, 상군, 흥화군, 연안군을 약탈한다.

 

이에 수문제는 특별히 조서를 내리며 마침 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던 돌궐 토벌을 명한다. 하간왕 양흥, 상주국 두노적, 두영정, 좌복야 고경, 우복야 우경칙을 원수로 삼아 돌궐의 사발략 가한을 대파한다. 이후 돌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세력이 둘로 나뉘니 수나라 북방의 변방 문제도 줄어든다.

위지형 등을 타도하고 이룩된 양견의 수제국은 결국 북주 이래의 부병제를 국가형성의 기반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북제에서는 그러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세력이 분산되어 상호 투쟁하고 결국 자멸의 길을 걸었다. 힘의 결집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진도 마찬가지였다.

 

6세기 중엽의 대혼란(후경의 난)은 거대한 하극상 현상을 보였다. 귀족이 몰락한 후 강남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실력자는 각지의 깡패 등을 불러들인 벼락 출세자와 벽촌의 토호들로 대체되었다. 진패선의 진나라는 난립하는 이 자립적인 소집단들을 확실하게 하나로 통합할 제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처럼 북제나 진 모두 국내의 여러 세력을 충분히 통합할 수 없었고, 아니 오히려 사회의 여러 세력을 결집하기 어려운 정세였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부병제 국가로서의 통합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북주-수제국이 전국 전토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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