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에 드리우는 그림자, 정제 우문천과 수공 양견 [101화]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북주가 북제를 멸망하기 직전, 이 당시 북방에선 유연이 멸망하고 돌궐이 부상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과 돌궐

서위 폐제 원년(552), 회황진 일대에서 유연이 돌궐의 공격을 받아 아나괴 가한이 자결하고 그 아들 암라진이 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북제로 도망간다. 또, 남은 백성들은 아나괴의 숙부인 등숙자(유연의 마지막 가한)를 왕으로 세운다. 비슷한 시기에 1대 돌궐 가한인 토문이 죽고 아들 과라가 뒤를 잇는다. 또, 그 뒤는 아들 사근이 잇는데 그가 목간가한이다. 사근은 바로 등숙자를 격파했고, 등숙자가 남은 백성들을 데리고 서위로 도망가자 유연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돌궐의 존재는 북주와 북제에게 중요했다. 이전에 북주는 유연에 공주를 시집보내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고, 이 시기에도 양주자사 양천과 무백 왕경을 보내 혼인 관계를 맺는 한편, 북제와의 단교를 이끌어낸다. 북방 유목민에 대해선 북주가 북제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양주자사 양천은 이전에 유연으로 가 혼인 관계를 맺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무제 보정 3년(563), 수공隨 양충(수문제 양견의 아버지)이 1만 병사로 10만을 동원한 돌궐과 북제를 공격한다. 그러나 공성전에 익숙지 않은 돌궐군은 효과적으로 공격에 나서지 못한 채, 이듬해 변경을 약탈한 뒤 돌아간다. 이후에도 돌궐은 서위, 북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북제의 변경을 압박한다.

 

무제 건덕 원년(572), 우문호가 태후를 알현할 때 그 배후에서 장사들이 뛰어나와 넘어뜨린 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리하여 우문옹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무제는 이전에 몰락하여 노비가 된 자를 해방하여 양인으로 하는 조령을 내리고 잡호雜戶를 폐지하는 조서도 내려 수, 당의 신분체제로 이어지는 조처를 하게 된다.

북주 무제 우문옹 사망, 선제 우문윤 즉위

선정 원년(578), 북주 무제 우문옹은 이전 해에 친정에 나서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했다. 북위 이후론 처음으로 위진남북조 북조의 통일이었다. 이어서 돌궐 정벌에 나섰는데, 운양에 이르러 병이 나자 낙양으로 돌아오는 중에 죽었다. 무제의 뒤는 태자 우문윤이 이었는데 이가 북주 선제이다. 그러나 큰 문제가 있었으니 우문윤이 망나니였다는 것이다.

노는 게 너무 좋아 ㅋㅋㅋ 북주판 북제 고위

우문옹은 자식들에게 매우 엄해 아들들이 잘못하면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특히 장남 우문윤에겐 강도가 유달리 심했다.

"자고로 폐위된 태자는 무수히 많다. 나의 자식이 대통을 잇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야 하겠는가?"

우문옹이 죽자 우문윤은 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죽는 것이 참으로 늦었다!"

이미 술과 여자를 좋아하던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아버지 아래의 비빈 중 미색이 뛰어난 자들을 자신의 후궁으로 맞았고 한 명만 두어야 할 태후를 무려 다섯이나 두었다. 그리고 보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대공을 세우던 제왕 우문헌을 죽였다.

 

우문헌은 위진남북조 시대 북제의 고연종, 고개, 고효형을 생포하는 북제 토벌 일등공신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스스로 명성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알기에 병을 칭하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우문윤이 궁으로 불러 죽였다.

 

우문윤은 민심을 얻으려 대대적으로 사면했지만, 길거리에 도적들이 너무 많아져 민심은 오히려 흉흉해졌다. 어룡백희로 칭한 가무단과 용춤과 난쟁이 농지거리, 공성전 연기, 코끼리 헤엄치기, 나귀 가죽 벗기기 등 기상천외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는 과거의 감정을 들춰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직언하던 왕궤와 우문효백이 대상이었다. 우문옹 치세 때 왕궤는 술에 취한 척 우문옹의 수염을 만지며 이런 말을 했다.

"이처럼 좋은 부친에게 좋은 아들이 없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우문옹도 생전에 우문윤의 됨됨이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제왕의 모습을 갖출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주 마지막 황제 우문천 (우문연)

더 놀고 싶었던 우문윤은 7세의 어린 태자 우문연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으니 당시 나이 21세였다. 자신을 천원황제天元라 칭했는데, 이즈음 그에게 고약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신하에게 회초리를 치는 버릇이었다.

 

120대를 때리는 것은 천장天杖이라 했는데 업에서 놀던 그가 홀연히 준마를 몰고 낙양으로 순회를 가기도 했다. 이를 쫓아오지 못하는 자들에겐 예외 없이 천장을 내리니 조정 신하와 황후들은 기를 쓰고 우문윤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절제한 그도 22세의 나이에 중병에 걸려 숨을 거두니 어린 황제 우문천(마지막 황제 정제)을 대신해 권력을 잡은 건 황후 양씨와 그의 부친 양견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마지막 통일 왕조 등장을 앞두고 있었다.

 

1. 나 황제 안 해!! 놀거야!!

논다고!!! 엄근진.

2. 황후 5명 등장

함께 놀아요!

3. 하하하 아들아 니가 황제 해라

아빠 나 황제임?

4. 나 황제? 7살인데? 외할아버지 양견인데? 외할아버지 둘째 아들이 양광인데?

이렇게 북주 황제는 바뀌었다. 무제 - 선제 - 정제

어정중대부 유방, 내사상대부 정역 등이 선제의 유조를 위조해 고명대신에서 이름이 빠졌던 양견을 추가해 넣었다. 거기엔 양견을 대승상, 도독내외군사로 임명하여 병마와 대권 쥐고 백관의 상주를 수리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외척으로 보위를 찬탈하여 위진남북조 시대 통일 왕조를 세운 양견의 수나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북위를 지배하던 이주영이 죽자 조카 이주조가 세력을 이끌었다.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이주조를 따랐으나 이후 독고신(서위 초기 하관부의 대사마로 군사를 담당했던 인물)을 따랐고, 우문태의 부하로서 동위 토벌전 등을 무장으로 참가해 활약했다.

 

서위 말년엔 주국대장군에 오르고 북주 시기엔 수국공隨, 대사공에 올랐다. 이후 당시 실권자인 우문호와 이해가 맞지 않은 채로 세상을 떠난다. 양충은 6주국의 한 사람으로서 부병군단을 이끈 우두머리였으나 북주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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