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 역사, 간신 야율을신의 천권 [무능한 거란족 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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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역사, 간신 야율을신의 천권 [무능한 거란족 도종]


난하에서의 정변 중에 지북추밀사사 야율을신과 야율인선 등이 공동으로 야융중원을 반격해 도종을 보호했다. 사건이 평정된 후에 논공행상을 통해 야율인선과 야율을신은 각각 북원과 남원의 추밀사로 임명되었고, 요나라 진왕晉王과 위왕魏王으로 책봉되어 공신명호功臣名號를 받았다.


야율을신은 점차 제멋대로 굴면서 야율인선을 배제했고, 권력을 독점하자 발호하기 시작했다.


대강大康 원년(1075)에 황태자 야율준耶律濬이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조정을 통솔하면서 법령 제도를 정돈하고 정사를 공정하게 처리했는데, 이는 요나라 야율을신의 권세에 위협이 되었다. 그는 황후 소관음蕭觀音의 노비 단등單登과 교방敎坊의 영인伶人 주정학朱頂鶴을 사주해 황후와 영인 조유일趙惟一이 사통했다고 무고하게 했다.

도종은 야율은신과 그 도당인 북재 자생 장효걸張孝杰에게 공동으로 심리하게 했으므로, 그들을 마침내 무고를 사실로 만들어 황후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야율을신이 자기 당을 지원하기 위해 동당인 소하말蕭霞抹의 질녀를 황후로 맞이하게 했다.


야율을신은 태자 야율준의 보복이 두려워 다시 태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임아 소암수蕭巖壽는 요나라 도종에게 은밀히 상주했다.


"황태자가 정사에 참여하면서부터 야율을신은 의구심을 품고 재상 장효걸과 뜻을 같이합니다. 아마 또 다른 꾀를 내고 있는 듯하니 요직에 앉혀서는 안 될 겁니다."


요나라 도종 야율홍기[중국 거란족 역사] 요나라 도종 야율홍기


이에 도종은 야율을신을 중경유수로 좌천했으나, 반년도 되지 않아 다시 불러들여 계속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야율을신은 추밀사로 재임명되자 태자를 모함하는 데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대강 3년(1077) 5월에 야율을신은 동당에게 남원대왕 야율살랄과 지북원추밀사사 소속살蕭速撒 등 여덟 명이 황태자를 즉위시키고자 모의한다고 무고하게 했다. 도종은 실제 증거도 찾지 못한 채 야율속살과 소속살을 각각 상경유수와 시평군절도사始平軍節度使로 좌천하고, 호위 살발撒撥 등 여섯 명은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6월에 요나라 야율을신은 다시 동당 패인랑군牌印郞君 소와도알蕭訛都斡에게 거짓으로 자복하게 했다.


"야율살랄 등이 야율을신을 죽이고, 황태자를 옹립하고자 했던 모의에 신들도 가담했습니다. 지금 스스로 말하지 않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연루될까 두려웠습니다"


요나라 간신 야율을신[중국 거란족 역사] 요나라 간신 야율을신


도종은 이 사건을 다시 야율을신과 장효걸에게 심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황태자는 수감되었고, 야율속살과 소속살 등 수십 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를 다시 서인으로 폐했다. 11월에 야율을신 동당은 황태자를 감옥에서 죽인 뒤 병사했다고 상주했다. 도종은 태자비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야율을신 돵은 그녀조차 죽여 입을 막아버렸다.


5년에 요나라 도종이 사냥을 나가자 야율을신은 황손 야율연희耶律延禧를 자신의 신변에 두도록 청원했다. 북원추밀사이자 동지점검同知點檢인 소올납蕭兀納의 거듭되는 경고로 도종은 비로소 야율을신을 의심했다. 도종은 일단 그를 지흥중부사知興中府事로 좌천시켰다가 7년에 그 죄를 물어 처형했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14년 동안 그는 자신과 결탁하지 않고 감히 자신의 죄를 폭로한 사람들을 연이어 조정에서 축출하거나 혹은 무고해 죽였다.


요나라 천조제 야율연희[중국 거란족 역사] 요나라 천조제 야율연희


당시 사람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위왕(야율을신)의 공문空文을 위반하기보다는 차라리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낫다."


요나라 황후와 태자가 그의 무고로 죽었으니 요 역사상 통치 집단에서 일어난 가장 원통한 사건이었으며, 도종 본인에게도 최대 비극이었다.


이러한 비극의 발생은 요 정치의 부패와 도종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다. 도종은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지 못했고, 황족과 후족 중에 어느 누구도 황후와 태자를 변론해 준 사람이 없었다. 이는 통치 집단의 심각한 갈등과 권력 투쟁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권력 투쟁은 흠애정변과 난하정변의 연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흠애황후가 집정하면서부터 후족을 끌어들였고, 이에 따라 세력이 커진 국구소부방國舅小父房이 조정을 좌우했다. 종실 간의 권력 투쟁은 이미 후족이 황권을 조종하는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요 후기에 드러난 권력 투쟁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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