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장보고와 이정기(이사도) 제나라 멸망, 당나라 무령군

신라 장보고와 이정기(이사도) 제나라 멸망, 당나라 무령군



[아래는 이정기 제나라 역사]


815년, 제나라 이사도가 강회 일대의 물산이 쌓여 있는 하음의 곡식창고를 불사르는 등 선제공격을 가했다. 이곳은 당나라 조정이 이사도 토벌을 위해 군수물자를 비축해뒀던 곳으로 저장된 군량미만 2백만 석에 달했다.


당헌종 이융기


이해 12월, 헌종이 강회의 번진들과 투항해온 번진들을 앞세워 이순 토벌에 나섰다.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에 10여 개의 진지를 구축한 이사도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 번진 토벌을 주장한 재상 무원형을 암살했다. 그러나 헌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이사도는 조정과 정면대결을 펼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당시 토벌군 선봉은 신라인 장보고가 소속돼 있던 무령군이었다.


이듬해인 816년, 당나라 무령군의 선봉장 왕지흥이 평음을 점령하면서 이사도는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됐다. 접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3년 뒤인 819년, 선무와 위박, 의성, 무령군의 협공을 받은 제나라 이사도는 마침내 군사 8만 명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동맹관계였던 하북3진의 군벌이 조정 연합군에 가담한 결과다. 결국 휘하 장수 유오가 운주성에서 이사도를 죽이고 투항하면서 싸움이 끝났다. 이로써 당나라 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55년 동안 유지된 고구려유민 출신 이정기의 군벌세력은 와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중국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 교민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또다시 일어나 황해무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장보고의 해상왕국이 그것이다. 그의 해상왕국은 군사 대신 무역을 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장보고張保皐


신라 장보고 동상


장보고가 해상을 제패한 것은 발해 일대를 제압했던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 이정기가 패망한 사실과 무관치 않다. 시기적으로 볼지라도 그의 활발한 해상활동은 이정기가 패망한 직후에 이뤄졌다. 막강한 번진군벌로 군림했던 이정기의 패망과 이름만 남은 당제국의 피폐한 상황이 장보고의 눈부신 해상활동을 부추기는 촉매로 작용한 셈이다.


장보고가 정작 조국인 신라보다는 당나라와 일본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 국제적인 인물로 통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장보고를 안사지란 때 활약한 곽분양에 비유했다.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는 칭송도 덧붙였다.


또한 일본 불교 천태종의 중흥조인 엔닌은 자신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당나라를 여행할 당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갔던 사연을 소개하며 이런 감사의 편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평소에 받들어 모시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고결한 풍모를 들었습니다. 엎드려 우러러 흠모함이 더해갑니다.


현재 알려진 장보고의 이름은 매우 많다. 궁복, 궁파 등이 그것이다.


중국 화이안시


신라에 있을 때는 신분이 낮아 성이 없는 궁복이라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활을 잘 쏜다는 의미이다. 중국에 가서 궁자와 한자가 비슷한 장씨 성을 사용하면서 복과 소리가 비슷한 보고로 바뀌었을 공산이 크다. 일본의 기록에는 장보고로 되어 있다. 보고는 재물을 많이 얻었다는 뜻으로 일본식 발음으로는 보고와 같다.


이는 그가 신분이 상승하면서 더욱 좋은 의미로 이름을 바꿔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출처 - 오대십국지, 신동준, 학오재, 저자 후기


근데, 이정기를 소재로 국수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위에 적힌 객관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글들이죠.


1. 이정기, 그는 누구인가

-> 밝혀진 게 없으니, 밝혀야 한다는 글인데,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진 사람에 대해서 뭘 더 밝힌다는 건지.


2. 장보고와 청해진 그리고 이정기와 제나라

-> 후백제의 후신이 제나라... 무역 때문에 백제나 신라의 것들을 받아들였던 건 그 이전에도 흔한 일이었으니 딱히 특별한 건 없는데...


3. 중국속 고구려왕국 齊제. 중국역사책에는 있지만 우리역사책에는 없는..

-> 고구려유민 2세, 3세가 세운 나라를 우리 역사로 편입해야 하면, 미국은 어느 나라 역사일까.


4. 평로치청왕국 - 고구려유민 이정기 건국

-> 이정기 일가의 세력이 다른 번진 보다 우위였던 건 맞는데, 그 기간도 그렇게 길지 않았고 나중엔 다른 번진의 공격을 받아 패퇴한 건데 과대평가도 위험...


신라방 화이안시


ps1. 중국 산동성 해상왕 장보고 유적지 답사 - 치박과 태산, 청주 답사

ps2. 예전 댓글.


A1. 舊唐書 李正己傳 附 李師古

貞元十年五月,師古服闋,加檢校禮部尚書。十二年正月,檢校尚書右僕射。十一月,師古丁母憂,起復左金吾上將軍同正。十五年正月,師古、杜佑、李欒妾媵並為國夫人。十六年六月,與淮南節度使杜佑同制加中書門下平章事。及德宗遺詔下,告哀使未至,義成軍節度使李元素以與師古鄰道,錄遺詔報師古,以示無外。師古遂集將士,引元素使者謂曰:師古近得邸吏狀,具承聖躬萬福。李元素豈欲反,乃忽偽錄遺詔以寄。師古三代受國恩,位兼將相,見賊不可以不討。」遂杖元素使者,遽出後以討元素為名,冀因國喪以侵州縣。俄聞順宗即位,師古乃罷兵。,後累官至檢校司徒、兼侍中。卒贈太傅。


이사고 스스로 '師古三代受國恩,位兼將相나라의 은혜를 삼대에 입어 벼슬은 장상에올랐다'고 했지요.


A2. 이사고 정도라면 뼛속까지 당나라 사람이었겠네요. 이사고를 포함해서 이전의 이씨 일가 모두 똑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번진들 과의 경쟁을 해야 하니 겉으로라도 당나라 조정에 최소한의 경외심도 보여야 했고, 당나라에서 태어나 당나라 사람으로 살아간 사람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볼 이유도 전혀 없군요.


신라 장보고와 이정기(이사도) 제나라 멸망, 당나라 무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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