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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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위진남북조 진나라의 창업자 진무제 사마염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한다. 천하 통일 이후에 권문세가의 사치 풍조를 막기는커녕, 자신도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으니 서진은 통일과 함께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셈이다.

 

서진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서진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진나라, 서진과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의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이야말로 신이다"

 

유송 시절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태치汰侈 편이 존재한다. 때찌,, 때찌 때찌 해줄 만한 낭비와 사치에 대한 내용인데 주인공은 무제의 외숙 왕개,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진나라 무제의 사위인 왕제다.

 

당시의 진무제 사마염을 포함한 당대 권력자들의 사치 행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는데 몇 가지만 언급해본다.

 

태치 1편

 

석숭(서진, 진나라 형주자사로 있을 때 약탈과 살인으로 부를 축적)은 손님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 때마다 항상 미인들로 하여금 술을 권하게 했는데,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않을 경우 ... 시중든 미인의 목을 베었다. ... ... 대장군(왕돈)은 한사코 마시지 않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었다.

 

이미 세 명의 미인을 목 벴지만 대장군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마시려 하지 않았다. 이에 승상(왕돈의 사촌 동생 왕도)이 질책하자 대장군은 말했다.

 

"자기 집사람을 자기가 죽이는데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위진남북조, 진무제 사마염)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위진남북조, 진무제 사마염

(위진남북조, 진무제 사마염)

 

태치 2편의 주

 

유식이 석숭을 방문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보았더니, 진홍색 깁 휘장이 드리워진 커다란 침상에 매우 화려한 요가 깔렸었으며, 두 명의 시녀가 비단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서진의 관료였던 유식은 황급히 도로 달려 나와 석숭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당신의 방 안으로 잘못 들어갔소이다."

 

석숭이 말했다.

 

"그곳이 화장실이오"

 

세설신어 화장실 서진 유식 석숭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세설신어 화장실 서진 유식 석숭

(요즘 고급 화장실. 그래도 화장실은 구분되지 않나?)

 

태치 3편

 

진나라 무제(진무제 사마염)가 어느 때 왕제의 집으로 행차했다. ... ... 찐 새끼돼지 고기가 통통하고 맛이 좋았는데 보통의 맛과는 달랐다.

 

... ... 왕제가 대답했다.

 

"사람의 젖을 새끼돼지에게 먹였습니다."

 

... 이것은 서진의 왕개나 석숭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태치 9편

 

... ...(위진남북조 시대 북망산 아래) 당시 그곳은 주민이 많았고 땅값이 비쌌다. 왕제는 말을 타면서 활 쏘는 것을 좋아했기에 땅을 매입하자 담을 쌓고 동전을 꿰어 지경의 담에 빙 둘러놓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금구金構라고 불렀다. (금구 = 금을 꿰었다는 뜻, 즉, 돈지랄한다고 비아냥대는 표현).

 

태치 11편

 

진나라 팽성왕(사마의의 동생인 사마규의 아들 사마권)은 빨리 달리는 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왕연은 그와 함께 내기 활쏘기를 하여 그 소를 얻었다. 팽성왕이 말했다.

 

"당신이 직접 타고자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 잡아먹고자 한다면 살찐 소 20마리와 바꾸었으면 하오.

그렇게 하면 먹여 없애지도 않고, 아끼는 소를 살릴 수도 있겠소이다."

 

그러나 왕연은 결국 그대로 잡아서 먹어버렸다.

 

서진 진나라 왕개 석숭 사치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서진 진나라 왕개 석숭 사치

(산호를 놓고 다투던 위진남북조 서진의 부자 왕개와 석숭)

 

석숭의 금곡시서

 

나는 원강 6년(296), 태복경에서 전출하여 진나라의 사지절 감청서제군사 정로장군이 되었다. 별장은 하남현의 경계에 있는 금곡간 속에 지었다. 혹은 높고 혹은 낮은데 맑은 샘과 무성한 숲이 있으며 과실, 대나무, 잣나무와 약초류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또 물레방아, 고기, 연못, 동굴 등, 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하듯, 당시 왕개와 석숭이 부와 사치를 다투었지만, 이 둘을 제외하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사치가 횡행했으며 황실과 고관들의 방종도 만연했다.

 

진무제 사마염은 후궁만도 1만이 넘었다고 하니 그 사치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황제와 황실, 그리고 고관대작들의 사치는 곧 이제 갓 시작된 통일 왕조 서진, 진나라의 멸망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진무제 사마염 향락. 후궁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진무제 사마염 향락. 후궁

(진무제 사마염 향락 - 후궁이 너무 많아 당나귀가 이끄는대로 이동하는 모습)

 

또한, 법 집행도 해이해져 돈이 있는 자들은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해 고위 자제나 노비들조차 돈만 믿고 법을 쉽게 어겼다. 당시 정위에 있던 유송은 법이 서질 않자 육형을 회복시켜 법 집행의 매서움을 보여줘야 한다는 상소도 올렸지만 그뿐이었다.

 

조정에선 여전히 가밀 등의 권력자에게 모든 것이 유리하게 집행될 뿐이었다. 거기다 더해,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말년에 후계자 선택의 실수로 멸망을 더 앞당기게 되었다. 진무제 사마염에겐 장자 사마궤가 있었으나 어릴 때 요절했고 본인도 문제가 있다고 시인한 다른 아들 사마충이 있었다.

 

한밤중에 우는 개구리를 보고 서진 조정에서 시켜서 밤새도록 울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할 정도로 세상 밖의 이야기도 잘 몰랐던 사마충이었다.

 

진혜제 사마충 위진남북조
[가남풍 남편, 통일 왕조] 진혜제 사마충

(백치황제 진혜제 사마충)

 

그럼에도 위진남북조 시대 화음현의 명문 고족인 양태후(생모는 양염, 여기서 말하는 태후는 양염의 사후 황후가 된 그 동생 양지)의 소생인 사마충을 후계자로 선택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부 금실이 좋았다

둘째,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귀가 얇았다

셋째,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이 총명했다

넷째, 양씨와 가씨의 정치적 결탁

 

서진의 양황후는 일전에 진무제 사마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적통을 세우는 것은 장유長幼로 하는 것이지 현우賢遇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귀가 얇은 사마염의 대신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양황후의 뜻을 받아들이는 아주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다음편 : 02. 팔왕의난을 유발한 서진 황제 사마충 [사마유 억울함]

 

위진남북조01.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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