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업 소란 소보권] 비정상적인 남제 황실의 기행 [63화]


소소업은 남제 경성(수도)으로 돌아와 아픈 아버지를 위해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서 황제가 되었다. 소색은 이 연극에 속아 문혜태자의 뒤를 이어 소소업을 제나라 황태손으로 삼아 제위를 물려준다. 방탕한 소소업은 국고를 함부로 썼고 황후 하씨도 난교를 즐기자 종실 소심과 소탄지는 은밀히 서창후 소란과 모의해 폐립을 준비했다.


애초 소색(소도성 아들)은 소소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5년 동안은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기고 너는 의견을 섞지 말 것이며, 5년이 지나서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라. 만약 스스로 이룬 것이 없더라도 아주 한스러워하지 마라 ... 만약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당연히 잘 해나가겠지!"

이전에 소소업이 황제가 되기 직전, 소색의 장례 중에도 소소업은 기녀들은 불러 곡을 연주하게 시키거나, 할아버지 소색의 병이 깊어질수록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었다. 중서랑 왕융 등은 소색의 둘째 아들이자 소소업의 큰아버지인 소자량을 황제로 세우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그러나 이후 남제 양무제(위진 남북조 시대 남조 4번째 국가 양나라)가 되는 소연 등을 비롯한 종실 제왕이나 대신들은 거사를 도모하는 왕융 등이 소인배임을 간파하고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


"도로에서는 떠들썩하며 모두 말하길, '장차 비상이 거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왕원장(왕융)은 세상을 구원할 정도의 인재가 아니니 그가 패할 것으로 보입니다."



진짜 황제 소란 (제명제)

소색 사후 소란은 장병들을 수습하여 왕융 등을 물리치고 소소업을 황제로 삼았다.


남제 소소업은 기무진지, 주륭지, 조도강, 주봉숙, 서룡구 등을 총애했는데 이들은 청탁을 받았으며 사사로이 칙령을 반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차라리 황제의 칙령은 거부할지라도, 중서사인(기무진지)의 명령은 거스를 수가 없다."


이런 말이 나돌 정도였다.


소소업은 좌우의 무뢰배들에게 함부로 상을 내렸고 궁 안에 초고가 싸움닭을 사들여 투계를 즐겼는데 이는 황후 하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소색이 쌓아둔 조정의 금은보화는 그의 사치에 쓰였고 소색이 아끼던 곽씨를 비롯하여 어여쁜 여자와는 무조건 간음하였다.

제나라 융창 원년(494) 7월, 소소업이 보위에 오른 지 7개월째 되는 달에 소란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왔다. 당시 소소업은 알몸으로 총희 곽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근신들이 배신한 것을 알자 자진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소란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그의 목을 베게 하고, 소소업의 동생 소소문을 보위에 앉히나 넉 달도 안 되어 그를 내쫓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제명제이다.


"태부 선성왕은 선황의 후예이며, 태조로부터 깊이 사랑을 받았으니, 의당 들어가서 보배스런 천명을 이어나가야 한다."



제명제 소란은 제고제 소도성과 제무제 소색의 자식들이 점차 성년이 돼 가는 것을 크게 우려해 이들을 모두 도륙했다.


남제 소도성의 아들 19명 중 11명은 일찍이 병사했으나 남은 8명은 이때 죽었고

소색의 아들 23명 중 6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고

소자향은 소색 시절에 반기를 들다 죽었는데 나머지 16명은 이때 죽었다.


소란은 다시 문혜태자(소소업의 아버지)의 나머지 두 아들인 소소수와 소소찬까지 죽였다. 종친 간 살육이 반복되자 회수 일대의 북위 접경지 장수들은 분분히 북위에 투항했고 투항하지 않은 제나라 지역은 약탈당했다.


소란은 영태 원년(498) 12월에 병사했고 16세의 태자 소보권이 즉위했으니 이가 남조 중에서도 특별한 암군 동혼후이다.


소소업 - 소란 - 소보권으로 이어지는 막강 라인업소소업 - 소란 - 소보권으로 이어지는 막강 라인업

위진 남북조 시대 남조, 특히 유송과 남제에선 황제가 친족을 대거 살육하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그리고 충동을 다스리지 못한 젊은 황제들의 공포와 시기로 얼룩진 살육도 마찬가지다. 중국 역사에서도 비정상적인 일이다. 권력자는 많든 적든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까 공포심을 품기 마련인데, 당시 유송과 남제에선 이 공포심이 유달리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위진 남북조 시대 동진 이후, 유유가 특별히 유언을 남기며 귀족들의 군권을 대부분 회수하고 이를 황제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력한 군부를 장악한 황족들에게 황제란 다른 황족보다 비교적 큰 무력을 장악한 존재에 불과했다. 난세에 군공을 세운 무인들이 많아졌고 그 집단들이 할거하며 "의리"로 뭉친 이 봉건 시대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다음편(64)에선 북조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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