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순장, 삼국시대 가야 이름과 문화 (지산동 고분군, 가라 임나 가락)

가야 순장, 삼국시대 가야 이름과 문화 (지산동 고분군, 가라 임나 가락)


가야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글자는 매우 다양해서 고려 시대 이전의 기록과 금석문에서만 가야伽倻-加耶-伽耶, 가라加羅-伽羅-迦羅-柯羅, 가락駕洛-迦落, 임나任那 등 삼국시대 10여 개의 역사적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등의 국내 사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으로서 삼국지의 구야狗邪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나 구야국이 가야연맹을 대표하면서부터 가야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삼국시대 역사 문화] 광개토왕비 가야 이름[삼국시대 역사 문화] 광개토왕비 가야 이름


2. 가라加羅는 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비, 5세기 말~6세기 초에 편찬된 중국사서 송서와 남제서,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이름이다. 고대 사료에서 가장 널리 쓰인 국명인데, 가야 연맹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대가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가야가 가야 연맹체의 (문화) 중심지였을 때, 대가야는 가라加羅, 금관가야는 남가라南加羅로 불렸다.

3. 임나任那는 주로 역사서인지 의심스러운 삼국시대 일본서기에 많이 나오며, 삼국사기 및 금석문에는 몇 개의 사례만 있다.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대게는 가야 전체를 포괄하는 이름이었으며, 신라보다는 백제 쪽에서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 가락駕洛은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처럼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삼국시대 역사 문화]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가야[삼국시대 역사 문화]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가야


가야라는 이름의 역사적 뜻에 대해서도 학설이 다양하다.


- 겨레를 뜻하는 알타이 말Xala에서 유래했다는 설

- 들판을 뜻하는 남방어Kara에서 유래했다는 설

- 큰 나라 또는 신의 나라神國라는 뜻이었다는 설

- 땅끝 해변에 위치한 갓나라邊國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설

- 낙동강을 비롯한 강 주변에 분포한 나라이므로 가람江 또는 갈래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문화적 설

- 성읍城邑을 뜻하는 구루溝婁와 같은 말이라는 설

- 가야인들이 머리에 쓰고 다닌 끝이 뾰족한 고깔모자 가나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삼국시대 가야 순장


순장은 죽은 권력자가 저 세상에서 잘살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 종속적 관계에 있던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 함께 묻는 장송의례葬送儀禮이다. 순장 풍습은 세계 곳곳의 고대국가 형성기 단계에서 주로 나타났는데, 한국 역사에서는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무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삼국지에는 부여에서 권력자가 죽으면 백 명 이상 순장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황남대총, 천마총 등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급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굽다리 접시, 고령 지산동 고분군[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굽다리 접시, 고령 지산동 고분군


[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모자꾸미개, 지산동 고분군[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모자꾸미개, 지산동 고분군


가야에서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양동리 고분군, 예안리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이른 시기의 순장이 확인되었다. 가장 이른 것은 3세기 말경 대성동 고분군의 사례인데, 대체로 시간이 지날수록 덧널무덤에 1인 -> 3인 -> 5인 순으로 묻힌 사람 수가 더 늘어나며, 문화적으로 5세기 초에 이르면 하위 지배계층 무덤에도 순장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4세기 이후에 조성된 예안리 고분군은 무덤마다 1~8인의 인골이 출토되었는데, 어린아이 비중이 높고 일부러 머리뼈를 변형시킨 편두偏頭 풍습 흔적이 있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4호 무덤과 45호 무덤에서도 많은 사람을 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44호 무덤은 중앙부에 으뜸덧널이 있고 그 남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의 작은 덧널이 더 있으며, 이들을 빙 둘러싸고 32기의 순장덧널을 배치한 뒤 이 모두를 함께 흙으로 덮어 하나의 무덤으로 만든 형태인데, 남인 인골 등을 계산하면 모두 37명 이상을 순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주목할 것은 작은 돌덧널에 묻힌 사람들은 비록 순장이지만 자신의 매장시설을 따로 가지고 있으며 껴묻거리 문화도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순장 당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상당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동시에 같이 묻은 순장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였던 집단의 사람들을 순차적으로 땅에 묻고 나중에 큰 봉토를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순장 흔적. 대성동, 지산동 고분군 덧널[삼국시대 역사 문화] 가야 순장 흔적. 대성동, 지산동 고분군 덧널


위 사진 설명


대성동 고분군 91호 무덤의 순장 모습

지산동 고분군 44호 무덤의 으뜸덧널과 순장덧널

지산동 고분군 75호 무덤의 으뜸덧널과 순장덧널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가야 순장, 삼국시대 가야 이름과 문화 (지산동 고분군, 가라 임나 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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