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의 난 개막 - 효명제가 유발한 북위 분열 [73화]

북위 영태후 시기. 당시, 조정 내부에선 변란이 일어나 청렴하며 재능도 있고 문학도 뛰어났던 청하왕 원역이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태후, 유등, 원예를 비난했다. 유등은 크게 두려워하며 원역을 모함한 뒤 살해했다. 너무 어렸던 효명제 원후는 유등의 거짓말에 속아 충신 원역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이어 유등은 영태후의 동생 남편인 원예와 조서를 꾸며 영태후를 연금시켰다.


"호랑이(유등)를 키우다 물린다고 하더니 바로 내(영태후)가 그 꼴이 되었구나!"

원예, 원예 부친 경조왕, 유등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변방 6진의 군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사사로이 남조와 교역해 부도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몰락한다.


이때 국인國人의 처우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6진의 군민들이 걸복막우를 추대해 반란을 일으키나 수용군의 추장 이주영이 제압한다. 비슷한 시기엔 종실인 원정덕, 원법승, 북방 유연의 난까지 일어나 북위 변방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사건이 우림의 변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비교할 케이스가 없는 독특한 사건이다.


효명제 신귀 2년(519), 한인의 명문 장중우가 엘리트 코스의 관직에 무인을 등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자 도성의 근위 군인들은 폭발했다.


우림군과 호분군의 병사 약 1천 명이 모여 상서성에 항의 시위를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돌을 던진 뒤 장중우의 저택을 태워버렸다. 중상을 입은 장중우는 아슬아슬하게 도망쳤지만, 그 아버지는 불구덩이에 던져져 큰 화상을 입고 이틀 후 사망하였다. 영태후는 고압적인 처치로 사건을 마무리하였는데, 가장 흉포한 8명만 사형에 처한 뒤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


이즈음, 6진과 도성의 우림군, 호분군 병사들의 신분이 점차 격하되어 이 당시엔 군적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이 통혼의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많은 귀족이 그들을 천류의 인간으로 멸시하였다. 다시금 북방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광 4년(523) 4월, 유등이 병사하고 영태후는 간신히 연금에서 벗어나 효명제 원후의 곁으로 돌아온다. 원예는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기에 큰 신경을 쓰진 않았다.


정광 6년(525) 2월, 원예에 의해 쫓겨났던 종실 원순을 시중으로 삼는다. 하루는 그가 영태후의 여동생을 가리키며 이런 말을 한다.


"폐하(영태후)는 어찌하여 자매 관계라는 이유로 원예의 죄를 다스려 천하인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영태후는 이전에도 원예가 친동생의 남편이라 결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이때 이르러 결심하곤 원예와 그 동생 원과에게 자진할 것을 종용하는 조명을 내린다. 이후 영태후는 이주영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짙은 화장을 하고 고관 친척 집으로 놀러 다니는 등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6진을 비롯한 변경 병사들에 대한 처우는 나아지지 않았다.



북위 남방인 제주, 동청하군, 동군, 광천, 진군 등지와 6진에서 연이어 반란이 일어나자, 군민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호응했으니 북위 쇠퇴가 가시화되었다. 효명제 원후는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못해, 위진남북조 시대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1. 옥야진의 파락한발릉破落汗拔陵은 진장을 죽이고 진왕眞을 칭했다(고궐에서 반란, 하투 황하의 지류인북하 북쪽).


2. 유현진의 두락주도 진왕을 칭했다(상곡, 찰합이회래현 동남).


3. 북위로 망명했던 소보인이 관우를 점거한 뒤 칭제했다.


4. 회삭진의 선우수례가 봉기했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자 회삭진장 갈영이 부중을 장악한다. 갈영은 북위 토벌군 총수 광양왕 원심을 잡아 죽이고 스스로 천자라 칭한 뒤 국호를 제濟라 하였다.


5. 고평진(감숙성 고현)의 백성 혁연은 등이 파락한발릉에 호응하여 칙륵 추장 호침을 고평왕으로 추대했다.


6. 진주성의 백성인 막절태제가 자친 진왕秦이라 하고 자사 이언을 죽인다. 후에 막절태제가 죽자 후에 막절태제가 죽자 그의 아들 막절염생이 뒤를 이어받아 천자를 참칭했다. 남진주성의 백성 손엄, 장장명, 한조향 등이 막절태제에 응하여 자사 최유를 죽이고 고평을 점거한다.



7. 양주성의 백성인 우보제가 자사 송영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서쪽 반란의 주 세력은 막절염생 등의 저족, 강족이었다. 이 반군들은 일시 정체하였으나 뒤에 다시 동진을 시도하였다.


8. 기주의 백성들이 막절염생에 호응해 자사 위란근을 잡자 화주와 빈주에서도 이에 응하였다. 그러나 내홍으로 막절염생이 살해되어 막절씨는 멸망하였다. 막절씨 멸망 뒤, 반란 토벌의 총수 소보인이 북위를 배반하여 옹주에서 자립을 도모한다. 그러나 북위 관군에 대패하고 만사추노 밑으로 달아나 그 밑에서 패잔의 여생을 보냈다.



9. 만사추노는 고평에서 일어난 호침의 부장이었으나 호침이 죽은 뒤 그 부중을 장악했었다. 북위 서쪽 반란의 후반은 만사씨가 중심이었다.


10. 한편, 회수 일대의 만족들도 기세를 올린다. 동형주, 남형주, 서영주의 만인들이 크게 동요하여 주요 강줄기를 장악하고 차단한다. 그러나 이들은 환숙흥(환온의 아들 환현, 환현의 아들 환탄, 환탄의 아들 환휘, 환휘의 동생 환숙흥)처럼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금세 흩어지고 다시 모이기만을 반복했다.



이런 전국 각지의 반란은 이주영이 낙양을 점거하고 실권을 빼앗은 530년 이후에 진압된다. 위진남북조 시대 한 왕조에서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 국가는 북위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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