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대 초기, 강남 호족이 사마예를 받아들인 이유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예를 받아들인 강남 호족들, 그 이유는?


서진은 팔왕의난을 기점으로 국운이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리고 사마씨 왕들 사이에 의심이 만연하게 퍼지죠. 팔왕의난 최종 승자는 동해왕 사마월이지만, 그도 결국 자신이 끌어들인 이민족의 손에 제거됩니다. 그 유명한 영가의난 당시에 말이죠. 


강남으로 이주한 사마예는 황위 계승권에서도 멀고, 그도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없던 그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예를 의심해 끊임없이 속박하고 낭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했습니다.


그렇게 험난한 시기를 넘어 기어코 강남으로 이주하여 동진 건국자 동진 원제로 추앙받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하다[진나라 서진 말기]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하다

(결국 강남의 주인이 된 것은 낭야왕이 아닌, 낭야 왕씨 일족)




  •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예는 무제의 숙부에 해당하는 낭야왕 사마주伷의 손자이다.

그는 8왕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해왕인 사마월越과 행동을 같이하였는데,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왕도의 조언에 따라 사마예는 304년에 수도 낙양을 탈출하여 봉지인 낭야(산동성)로 피했다.


그 후 동해왕 사마월이 305년에 서주 방면(강소성 북부)에서 세력을 회복하자 또다시 그를 따라 307년 7월 서진의 회제懷帝를 옹립하고, 정무를 주재하는 동해왕으로부터 안동장군安東將軍, 도독양주제군사都督景州諸軍事(양주 방면 군사령관) 직을 받았다.


그 직은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 정부가 진민과 강남의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주복에게 이미 내린 것인데, 주복이 동해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항 조치로서 사마예에게 새롭게 내려 준 것이다.


왕도의 진언에 따라 사마예는 왕도와 함께 건업으로 진입하였으나 강남 호족들은 처음에 그에게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처지에서 보면, 양주 방면 군사령관으로서 실제로 『군대를 통솔하고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쪽은 양자강 북측에 있는 주복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과 사마예[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과 사마예


따라서 소수의 무리만을 거느린 사마예를 과연 강남의 중추인 건업에 진입한 새로운 군사령관으로 대우하여 협력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까지의 군사령관인 주복과 이 새로운 사령관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등을 잠시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강남의 호족들은 앞서 보았듯이 격심하게 유동 현상을 보이는 강남 사회의 안정을 열망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그들만의 힘으로 협력해서 강남에 독립정권을 수립할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민의 난의 경험에 비추어, 수춘에 있는 주복의 군대 등에 대항하기에는 군사력이 다소 불안하였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주변의 진군으로부터 협공당할 것을 염려하였다. 즉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적으로 되지 않을 명분과 진조(위진남북조 시대 서진)로부터 강남 일원의 질서유지를 위탁받는 방패막이였다.


건업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황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대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사마예는 도독양주제군사로서 강남의 질서유지에 관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진왕실의 한 사람으로서 방패막이의 역할을 하기에 적합했다. 단 하나, 사마예 등이 강남 호족들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주복과 혹여 타협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마예, 왕도 등이 주복과 타협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강남 호족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드디어 그들은 사마예를 추대하고 강남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뛰어들었다.




이 당시 왕도는 끝까지 사마씨 정권에 충성합니다. 재밌게도 왕도가 일으킨 왕씨 집안은 왕돈 때문에 몰락하죠.


강남 호족은 손제리, 손권 손오 시절에도 자신감이 강해서 결코 타협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강남 호족이 사마예를 받아들인 배경엔 영가의 난으로 촉발한 변방 위험성과 중원에 자리 잡은 이민족 국가 한나라가 있었습니다.


겉으론 사마씨 황제에 협조적이나, 결국 본인들이 갖추지 못한 황제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예를 받아들인 강남 호족들,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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