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발췌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출판사 


중국 본토는 대게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으로 크게 나뉜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 명명되며 건조도가 높아 삼림이 충분히 생육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삼림이 자란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채벌되면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회수 이북에는 삼림지대가 형성되기 힘들었고, 이에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은 화북의 대평원은 전망이 좋고, 공간이 열려 있어 집단의 이동이 쉬웠다.



회수, 회하淮河로 불리며 화이허라 발음됨회수, 회하淮河로 불리며 화이허라 발음됨



또한 치수가 어렵기로 유명한 황하의 물을 거의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소규모 관개와 자연의 천수를 주로 이용하는 소위 소관개 천수 농경 지대였다. 뜻밖에 농사에 가혹한 환경에 처한 화북이었음에도 이를 극복한 사람들이 농업 생산량 확대를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 땅이었다.


  • 당연히,
  • 중국의 문명과 사회의 중심은 이러한 지대의 위에서 싹틔여왔고
  • 한고조 유방 이래로 서진남북조 말기까지 이는 꾸준히 유지됐다.

한나라란 통일 왕조가 건국되고 농경기술의 진보와 보급 등에 의해 화북에서는 미개간지 개발이 추진되었다.




이에 가경지 면적이 크게 증대하였고 각지에서는 부유한 호족과 빈농으로의 계급 분화가 진행되었으며, 이 계층을 중심으로 학문과 문화가 수용되어 두터운 지식인층이 퍼지게 되었다. 여남, 진류, 노국, 동래, 북해 등은 예로부터 유명 문사들이 배출된 지역인데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은 지식인을 배출할 수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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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각 지역의 출신들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도 했고 물적, 인적 축적이 강화되자 각지의 힘이 강해져 오히려, 통일은 붕괴하고, 지방은 분열되어 각각의 지방이 독자적으로 살길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는 오, 동진, 송, 남제, 양, 진陳이 차례로 세워졌던 남방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 기원전 2세기 말, 사기의 화식열전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일찍이 초, 월의 땅은 토지가 넓고 인구는 적으며, 인민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어류로 국을 끓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화경하고 물갈이하기도 했다. 과실, 어패류 등은 자급할 수 있고, 토지의 성질은 식물이 풍부하여 기근 걱정이 없다. 그러므로 강江, 회淮 이남에서는 굶는 사람은 없고, 그 대신에 천금을 쌓은 부호도 없다."


(발췌 끝)



서진말기 5호의 내투서진말기 5호의 내투




위의 내용은 여유롭고 부유한 양자강 일대의 삶을 기술한 것이다. 후한 시대만 해도 남경 일대(남조의 수도 건강 일대, 즉 삼오 지방)는 벽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의 인구가 증가하고 화북 일대에 혼란이 일자 강남으로의 인구 유입이 급속도로 늘어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으니 그 시기는 5호가 발호한 이래로 정점을 찍는다.


5호의 난으로 화북 일대가 폐허가 되는 와중에 1세기 가량 늦게 시작된 강남 일대의 개발과 호족들의 발호는 오히려 강남의 선진화에 기여했다.

양무제 소연 시기엔 문화적 수준은 남조가 북조를 앞서니 한나라 고조 이래로 시작되어왔던 강남의 개발이 빛을 발한 것이다. 그러나, 강남 일대의 호족들은 남조 정부에 모든 것을 내주지 않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의리"로 대명되는 군신 관계를 유지한 것은 특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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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는 남조의 양나라 시기에 크게 드러나는데, 호족을 제압한 지방의 황족 종친들이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며 황제가 된 자신의 핏줄에게 의리를 강요한 것이었다.


의리를 강요하며 자신들의 『독립적인 지위』를 요구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조정에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이들을 제압하려는 시도 자체가 거의 없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런 사례는 삼국시대 손권과 제갈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중국 게임 삼국지智 속의 제갈근. 얼굴이 길지 않아 의외중국 게임 삼국지智 속의 제갈근. 얼굴이 길지 않아 의외



"자네는 공명(제갈량)과 형제다. 게다가 동생이 형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도리로서도 마땅하다. 어째서 공명을 우리 진영에 붙들어 두지 않는가."


"동생은 남을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고 충성계약을 하여 주종의 분分을 정했기 때문에 사람의 도리로서 두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동생이 여기에 머물지 않는 것은 제가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소실되었으나 수서隨 경적지에 그 이름을 작게나마 남긴 위진시대 명사 전기 일람엔 지역별 명사의 이름이 담겨있다.


이들은 각 지방의 자의식이 높아진 증거로 추대된 것으로 이러한 의식은 5호의 발호와 함께 어느 정권에 가문을 맡겨 그 정권을 크게 일으킬 것인가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남조의 사족들처럼 서진남북조 말기엔 하나둘 일족이 주살, 또는 도륙되는 과정에서 가세가 기울어 없어진 가문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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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유능한 관료를 필요로 하던 수나라를 시작으로 과거와 같은 능력별 관리 선발 제도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한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다.


조비 시절의 위나라처럼 구품관인제를 시행하려 해도 시행할 사족 자체가 없어진 게 이유였다.


물론 그게 이유 전부는 아니었으나, 5호 16국 시대와 남북조를 거치며 한나라 이래로 이어져 오던 학식과 가문의 혈통보단 난세에 많은 공을 세운 군벌 세력의 대두가 몰락되는 사족들의 존재감을 없애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북주, 북제를 거치며 전통적인 사족보단 전쟁 영웅이 더 존귀해졌고, 남조에서도 군벌 출신들이 황제가 되었다.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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