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vs 성한(오두미도) vs 후조 - 환온과 유량 [33화]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위진남북조 범장생 조형물위진남북조 범장생 조형물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이렇게 말하며 우려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치가 형제는 도사(오두미도)에게 아첨하고, 하가 형제는 부처에게 아부한다."


성나라가 세워지자 서진 정부는 호북성의 백성들을 군대로 삼아 토벌하려 했다.


때마침 호북성 인근이 대풍작을 이루었고 8왕의 난이 시작되어 호북성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속속 남하한다. 서진 정부로선 불행이고 성나라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위진남북조 성한 황제 이웅위진남북조 성한 황제 이웅


성한의 이웅은 관후하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죽기 전엔 이미 죽은 형인 이탕의 아들 이반을 황태자로 삼았으나 이반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웅의 아들 이월, 이기가 보낸 자객에 목숨을 잃는다. 이월은 이기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서출인 까닭에 이기가 보위를 잇는다.


성품이 잔혹했던 황제 이기는 형제와 조카들을 모두 독살해 버린다. 당시 양주를 지키던 이특의 동생 이양의 아들 한왕 이수 역시 목숨에 위협을 느꼈다.


옥항 4년(338) 3월, 성도로 가서 이월을 죽이고 황제 이기를 연금한다. 이수는 보위에 오르자 국호를 한漢으로 바꿨기에 사가들이 성한成漢이라 부르는 이유다.


성한의 황제 이수도 이기처럼 포악했으니, 이웅의 자손을 모두 죽였으며 부녀자는 간음케 한 뒤 일거에 죽였다.


이수는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후조를 방문했던 사신들이 석호의 궁전이 장려하고 미녀가 궁에 가득 차 있다는 말에 자신도 그것을 따라 하며 황제의 삶을 즐기지만, 재위 6년 만인 한흥 6년(343)에 병사하고 아들 이세가 즉위한다.

이세도 아버지 이수를 닮았으니, 보위에 오르자 친동생과 직언을 아끼지 않던 마당, 해사명 등을 죽인다.


얼마 후 종실 이혁이 거병하자 포학한 황제들에게 시달렸던 백성들이 크게 호응한다. 그러나 이혁은 성도 공격 당시 앞장서서 달려가다 화살에 맞아 즉사해 그 세력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만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동쪽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환온의 속료 중 한 사람인 강하상 원교가 진언한 것이 발단이었다.


"천하를 경략하는 대사는 범인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천하에 우환이 되는 것은 호인과 촉 땅의 도적뿐입니다. 촉 땅은 비록 험하다고는 하나 그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게다가 저들은 민심마저 잃고 있습니다.


정병 1만 명을 선발해 경무장으로 쳐들어가면 이세를 능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곳을 장악하면 실로 국가에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환온이 오두미도 나라 촉(성한)으로 진격한 것이다.


위진남북조 동진 환온, 북벌 실패위진남북조 동진 환온, 북벌 실패




여기서 동진의 그 이전 이야기를 해보자.


그 이전인 함화 4년(329) 5월, 시안공 온교가 병사하고 함화 9년(334)엔 장사공 도간도 세상을 떠난다. 남은 건 반성한 줄 알았던 유량이었다.

강주, 형주, 예주, 익주, 양주, 옹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하며 무창에 주둔하던 그는 조정의 신망을 받으며 동진의 중심축을 담당하던 왕도가 미워 치감에게 밀서를 보내 끌어내리려 노력했다. 당연히 치감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중원 회복을 기치로 내건다.


사천성 강족 유적지사천성 강족 유적지


함강 5년(339), 조용히 내실을 다지던 동진의 왕도와 치감이 세상을 떠났다. 


감은 경구와 장강 건너편의 광릉 일대에 자신의 집단을 정착시키고 건강을 지키기 위한 군사력 육성을 하였으나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치감은 임종 직전에 이런 편지를 성제 사마연에게 보냈다.


"제가 인솔하고 있는 무리는 잡다하게 모여든 사람들로, 대개 북방 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몰려서 저와 함께 이주해 온 자이거나 저에게 새로이 몸을 의탁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모두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만 제가 폐하의 어명을 받잡고 토지와 주택을 나누어 제공해 준 결과 점차 정착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불안해할 것이고, 만일 그들이 북방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병력에 구멍이 뚫려 큰 소동이 일 것이니, 이들 무리가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저의 후임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동진 정부는 이 유언에 충실이 따랐다.



위진남북조 후조 영토위진남북조 후조 영토



한편, 반성이라곤 할 줄 모르는 유량이 북벌을 위한 상소를 올린다. 당연히 말장난이었고 그가 얻고자 했던 건 "나 용감한 사람임 ㅋ" 이거였다.


오히려 후조의 공격으로 수비를 위한 지원병을 보내야 했던 그는 "그까짓 거 빼앗겨도 그만"이라며 지원병을 보내지 않아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해 회수 일대의 요충지를 내줬고 북벌의 교두보 또한 사라졌다. 원망의 목소리를 듣던 그는 혼자 울분에 빠져 세상을 떠나니 별반 다를 거 없는 그 동생 유익이 형 유량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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