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 환온 1차 북벌, 강족 요양 반격으로 장안 왕맹을 잃다 [35화]

환온은 파촉의 성한 평정의 공으로 정서대장군, 개부, 임하군공에 봉해졌다.


촉을 평정하자 환온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켰고 조정을 장악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양주자사 은호를 심복으로 삼아 조정 대사에 참여시킨다.


이런 조치로 동진 조정은 환온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리게 된다. 이런 일은 이후 벌어질 환온과 은호의 북벌,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은호의 강족 불신은 동진 북벌 군대에 악영향을 미친다.



동진 목제 영화 5년(349), 동진으로선 북벌하기 좋은 시기였다. 후조의 석호가 병사하며 석씨 종친 간 내분이 일어나자, 환온이 북벌의 상주문을 올렸다. 그러나 사마욱을 위시한 동진 조정은 환온이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게 탐탁지 않았다.


환온 대신 저태후의 부친인 저부에게 명해 경구에서 북벌군을 파병시키도록 한다. 그러나 담략이 없던 그는 많은 병사와 장군을 잃었으며 동진 군사만 바라보고 남하하던 한족 20여만 명도 놓친다. 저부는 곧 병이나 진중에서 사망한다.


파촉 성한 위진남북조 유적[위진남북조 시대] 유적 파촉 성한


위진남북조 동진 영화 6년(350), 저부의 군권이 고스란히 은호에게 넘어가고 이후 북벌의 명도 은호가 받는다. 애초 은호가 병권을 쥐었을 때 그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 조정에서도 그에게 병권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여론이 많았다.


환온도 그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음을 측근 치초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은호는 덕행도 있고 언어에도 뛰어나오. 만약 상서령이나 복야가 되었다면 훌륭히 백관들의 모범이 되었을 것이외다. 조정의 인사법이 그의 재능과 달랐던 게요."


은호는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고 사마욱이 여러 차례 애원하자 부득이 밖으로 나와 일거에 양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은호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못했다. 속도 좁았다.


[위진남북조] 은호는 환온에게 빈 편지를 보낸다. 이 일로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위진남북조] 은호는 환온에게 빈 편지를 보낸다. 이 일로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

7만의 병력으로 북벌을 준비할 즈음, 투항해온 강족의 요익중과 그의 아들 요양을 계속 의심하고 핍박해 반기를 들게 하였다. 북벌은 시작도 안 했는데 강족의 공격을 받아 군대가 궤멸해 버렸다. 동진 조정은 일이 이렇게 되자 환온의 북벌 상서를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동진 목제 영화 10년(354), 다시금 기회를 엿보던 환온에게 마침내 북벌의 기회가 생겼다. 3월, 환온은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릉에서 출발했다. 수군 함대는 양양에서 균구로 향했다.


환온의 제1차 북벌이 시작됐다.


[위진남북조] 전진 황제 부견, 부건 조카[위진남북조] 전진 황제 부견, 부건 조카




[위진남북조 동진 북벌 정책] 1차 북벌에 나선 동진 환온의 목표는 관중에서 천왕을 칭한 위진남북조 시대 저족 추장 부건(당시는 전진 황제)이었다. 상락과 청니를 먼저 취하고 서쪽으로 돌아 자오도를 빠져나와 장안을 쳤다.


부건은 애꾸눈 아들 부생에게 영격을 명했고 용장이던 부생은 동진의 군대를 격파한다.


반면 장안 방면의 북벌 군대는 승리를 거듭해 5월엔 장안 인근인 위수의 지류인 파수까지 진입했다. 환온이 일대 군민을 위로하는 포고문을 내자 군민들이 앞다퉈 동진 군대에 합세했다.


[북벌 정책] 환온 1차 북벌[북벌 정책] 환온 1차 북벌

(출처 : 네이버 타이콥)


그때, 위진남북조 시대 유명한 책사이자, 부견의 책사로 명성을 날린 왕맹도 있었다. 왕맹이 군영에 찾아가 이같이 말했다.


"명공은 천 리 길도 마다치 않고 적진의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왔소. 지금 장안이 지척에 있는데도 파수를 건너 진공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명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소."


환온이 대답했다.


"강동에는 당신과 같은 인물이 없소!"


당시 환온의 북벌군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동진 환온 북벌 및 저족 부건, 강족 요양 반격 [35화][위진남북조 시대] 어려서 총명했던 부견

병참 문제로 군량 보급이 늦어졌고 전진의 군대가 청야 전술을 사용해 성 밖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기습에 당황했던 전진은 이내 군대를 수습해 반격에 나섰다. 진주자사 왕탁은 부하들에 의해 강제로 전진으로 끌려갔고 사마훈도 대패했다.


환온은 양양으로 퇴각하며 왕맹에게 함께할 것을 권했지만, 거절당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환온의 1차 북벌은 이렇게 끝이 났다.




목제 영화 12년(356), 강족의 추장 요양이 허창을 점거했다. 여세를 몰아 이미 동진에 반기를 들고 독립 상태로 있던 주성의 낙양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다. 요양으로선 낙양과 허창을 거점으로 나라를 세우려 했기에 필사적이었다.


7월, 동진 조정은 환온을 정토대도독에 임명하고 사주와 기 등 2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의 2차 북벌에 나서도록 명했다. 목표는 요양이었다.


강릉에서 수륙 양면으로 진공하던 환온은 이런 말을 했다.


"백 년 가까이 신주(중원)를 황폐하도록 버려뒀으니 왕이보(왕연) 등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9월, 환온의 군사가 낙양성 남쪽 이수에 이르렀다.


요양은 낙양의 포위를 푼 뒤, 동진의 군사를 영격하기 위한 군진을 펼친다. 처음 그는 환온에게 항복하는 척하면서 매복군으로 환온을 칠 생각이었지만 환온은 속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요양의 군사 수천 명의 목을 벤다.


위진남북조 강족 요양[위진남북조 시대] 강족 요양


요양은 중과부적으로 낙양 북쪽으로 퇴각했다가 이내 추격군에게 또 피해를 보고 평양까지 달아난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허창과 낙양의 백성들은 요양이 멀리 떠나자 슬퍼했고 그가 다쳤다거나,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북쪽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애민 행보에 따른 결과로 위진남북조 시대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요양이 도망가자 낙양의 주성도 더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해 환온에게 항복한다. 환온은 속료들을 이끌고 서진의 황릉을 찾아가 참배한 뒤 병사 2천으로 황릉을 지키게 했다.


이어 3천여 호의 백성을 평원으로 이주시키고, 주성을 건강으로 압송케 했다. 동진 조정은 이 공을 높이 사 남군공으로 봉한다. 그의 아들 환제도 임하현공에 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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