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 무제 유유, 원가의치 송문제 유의륭 즉위 [57화]

송나라 무제 유유 (송무제)송나라 무제 유유 (송무제)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

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토단법을 시행했고, 자신이 북부의 군사력(북부병)을 바탕으로 쿠데타에 참여해 성공했기에 군권을 황실로 옮기는 조처를 한다.


북부병에 대적할만한 서부의 형주 일대는 왕돈과 환온이 거병했던 곳이기에 동생 유도연에게 맡긴다.


송 왕조로선 지방 군벌의 성장을 막고 황실의 권력을 키우는 조치였지만 제후왕들은 여전히 강남 호족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황실에 "의리"를 운운하며 유송이 망하는 그때까지도 강력한 군권으로 황제를 위협하게 된다.


422년,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의 건국자 송무제 유유가 사망한다.



그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2개 조항을 포함한 유서를 남긴다.


"경구는 군사상의 요지이고 또한 옛 수도인 건강에 가깝다. 고로 황제나 근친 이외의 자를 그 장관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


"형주는 양자강 중류 지대의 요충지이다. 황자를 순차적으로 그 장관에 임명하라."


남조의 송과 제는 군사정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귀족의 군권은 무력했으나 황족의 군권은 강력했다. 교양있는 귀족에서 미천한 신분 출신이나 군공을 세운 무인들로 군부의 장관이 바뀌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유송의 황제 유유 자체가 미천한 신분 출신의 무인이기도 했다.

유의부, 유의진, 유의륭

유송은 유유의 황태자 유의부(소제)가 보위를 잇지만 유유의 거상居喪 중에 고기를 먹고, 음주와 가무를 즐겨 여러 번 상소를 받았다. 화림원에 시장을 만들어 상인의 옷을 입고 물건을 팔며 노는 등 비행을 일삼자 고명대신인 서선지, 사회, 부량 등이 태후의 명을 받들어 신안에 연금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424년 5월의 일이다.


얼마 후, 유송 무제 유유 세 아들의 운명이 갈린다.


  1. 유의부는 체격도 크고 힘도 강했기에 남연주자사 단도제 등이 유의부의 머리를 쳐 기절시킨 뒤 살해
  2. 둘째 아들 유의진(장안을 약탈하고 소인배를 좋아했던 그놈)은 서선지가 살해
  3. 강릉에 머물던 셋째 아들 유의륭을 찾아가 보위를 이을 것을 권하지만, 아직 두 형이 죽은 걸 모르는 유의륭은 둘째 형 유의진을 의식해 거절



이에 사마 왕화력이 이런 말을 한다.


"지금 몇 명의 중신이 전하를 너그럽고 어진 인물로 생각해 옹립고자 하니 전하는 우선 그들을 감격게 만들어 권력을 튼튼히 하십시오. 저들은 전하를 어린 주인 정도로 생각할 뿐 다른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유의륭은 이 말을 듣고 건강으로 가서야 형들의 죽음 사실을 알고 오열한다.


곧장 원가의 치治로 유명하며 송, 제, 양, 진을 거치며 그 유례가 없는 위진남북조 시대 성군이었던 송문제, 유의륭이 즉위한다. 곧 서선지를 사도, 왕홍을 사공, 부량을 개부의동삼사, 사회를 위장군, 단도제를 정북 장군에 임명했다.

원가의치 송문제 유의륭 즉위

원가 3년(426), 송 왕조 내부에서 권력이 비대해진 서선지, 부량, 사회 등을 나포해 죽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황제를 압박했고 마침내 왕홍, 왕호, 왕담수, 은경인, 유잠, 사홍미 등을 발탁한 문제의 손에 그 일당도 모두 퇴출당한다.


"그대(부량)는 강릉으로 와 성심으로 짐을 맞이했으니 그대의 모든 자식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단도제와 왕홍이 소제(문제의 큰 형이자 유유의 장남 유의부) 폐립에 가담하지 않은 것을 알기에 형주의 사회를 제압할 당시 선봉에 내세웠다.


19세의 어린 황제는 이렇게 유송 시대, 원가의 치를 시작했다. 동진 의희 연간에 이뤄진 토지를 기초로 호적을 정비하고 백성들의 조세와 채무를 면제하는 한편 학문과 농사를 권장하여 인재를 발탁했다. 생산량이 늘자 백성들도 풍요로워졌으니 송서 문제기와 독통감론에는 이런 기록이 남게 됐다.


마침내 즉위한 송문제 유의륭마침내 즉위한 송문제 유의륭


문제기


송문제의 치세 30년 동안 백성들이 크게 풍요로워졌다. 백 호 단위의 마을마다 시읍이 있었고, 노래와 춤이 그치지 않았다. 실로 송나라의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극성한 시기였다.


독통감론


큰 변란이 일어난 상황에서 보위에 올라 대권을 장악한 뒤 권신을 제압하고 대란을 평정했다. 보위를 탐하지 않고, 사적인 은혜에 얽매이지 않고, 흉맹한 위엄을 꺼리지 않고, 애통함과 분함을 풀었다. 이로써 한 사내가 마침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구나!


관련 글

56화 북연 건국

55화 대하 멸망

54화 북위 도무제 시해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