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선비 북주 건국 과정 - 우문태를 배신한 주나라 우문호 [100화]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제나라(북제) 멸망 이후 풍소련은 이후에 고위가 모반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주살되니 우문달에게 하사됐으며 양견이 북주의 보위를 찬탈하자 우문달의 정비인 이씨의 오빠 이순에게 하사됐다가 이순의 모친에 의해 자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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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북주)

위진남북조 시대 북방 통일을 이룬 북주의 무제 우문옹의 뒤를 이은 건 아들 선제 우문윤이다. 선제에겐 북주와 북제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선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주색에 빠지고 공신들을 제거하며 국력을 소진했다.

 

재위한 이듬해인 579년, 7살에 불과한 태자 우문천(우문연衍에서 우문천闡으로 개명)에게 보위를 물려주니 그가 정제이다. 선제는 스스로 천원 황제를 칭하며 전횡을 일삼자 이듬해 580년 황후의 아버지 양견이 관료들의 추대를 받아 집정하고 또 이듬해인 581년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隋나라를 창시한다.

 

북제는 기름진 땅과 넓은 평야를 보유해 북주에겐 항상 국력상 우위에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이미 5호 16국 시대 말기, 남조의 국가들에 뒤쳐졌다. 그러나 모든 걸 극복하고 우문선비는 북방을 통일했다.

어린 황제의 비극 - 북주 우문천

북주 형성 과정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 영안 2년(529), 당시 조정을 장악했던 이주영은 이주천광을 관중에 파견하여 이 지방의 반란 세력을 토벌케 했다.

 

영안 3년(530) 4월, 진농 지방을 근거로 세가 가장 컸던 만사추노를 평정하여 관서가 평온을 되찾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같은 해 9월에 이주영이 비명에 죽고 다음 해 6월, 고환이 낙양에서 패권을 쥐자 천광은 옹주에서 동진, 그 일족과 연합하여 고환과 한릉에서 대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도망가다가 포로가 되었다. 천광의 패배로 지금까지 관중에 머물며 그곳을 지키던 부장 하발악이 태도를 돌변하여 옹주를 점거하곤 자칭 관서대행대의 지위에 올랐다.

 

하발악은 무천진 출신의 선비족으로 북진 반란 때 이주영에 의지하여 그의 신임을 얻어 이주천광 입관 때 그 부장으로 선임되어 종군한 인물이다. 낙양에서 실권을 장악한 고환은 하발악을 회유하기 위해서 그의 관서대행대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한편 북위 효무제와 고환의 대립이 심화하면서 무제 일파는 하발악 세력에 의지하고 하발악의 형 하발승을 남쪽 형주의 요지에 배치하여 이 두 형제 세력을 등에 업고 고환에게 대항하려 하였다. 고환은 하발악을 제거하기 위해 원래 이주천광의 부장으로 하발악과 같은 서열인 진주자사 후막진열의 불만을 이용했다. 후막진열은 고환과 내통하다 기회를 보아 하발악을 암살하였다.

 

이에 같은 무천진 출신 선비족인 하주자사 우문태가 이들을 흡수하게 되어 우문태는 관서의 패자로 부상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문태(우문선비)는 당면의 적인 후막진열 토벌에 전력을 기울여 북위 영희 3년(534) 4월에 그를 제압하고 진롱지방에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고환의 횡포에 못 이긴 효무제 원수가 우문태에게 몸을 맡기니 당시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는 동과 서로 나뉜다. 그런 효무제도 우문태와 마찰을 빚다 살해되고 효문제의 손자 원보거가 보위에 오르니 그가 서위의 문제이다.

 

서위 멸망과 북주

문제도 이후 사망하고 태자 원흠이 뒤를 이으니 그가 폐제인데, 우문태를 제거하려는 모의가 있었고 황제도 동조하였기에 폐위된 뒤 살해된다. 이어 원보거의 넷째 아들 원곽이 보위에 오르니(554년) 그가 서위 마지막 황제인 공제이다.

 

이전의 서위 문제 대통 원년(535),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던 우문태는 우문선비 군사를 모두 8부部로 나누어 부마다 주국대장군을 두었다. 이른바 8주국八株國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부병은 직업 군인으로 군사 활동 이외엔 그 어느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이주영, 고환과 마찬가지로 6진 출신인 우문태는 저 둘과는 다르게 유학을 신봉했으나 선비족(우문선비) 고유의 풍습도 중요시했다.

 

국호인 주周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큰 것이다. 우문태는 탁발씨의 북위가 바꾼 성씨 99개도 원래의 성씨로 변경했으며 주나라를 베낀 관직과 조정 제도도 정비했으니, 서위 효무제 시절부터 실질적인 황제로서 국가의 기반을 탄탄히 다진 셈이다.

 

북주 우문호

서위 공제 3년(556) 10월, 우문태가 병사하고 우문태의 죽은 형인 우문호顥의 아들 우문호護가 우문태의 3남 우문각을 옹립한다. 2달 후, 15세의 우문각이 선양을 받아 주례에 근거하여 천왕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북주 효민제이다.

우문호는 우문태의 오른팔이 되어 집안일을 위임받았고, 북주 건국 뒤엔 대총재, 도독중외제군사 등의 자리를 차지하며 북주의 절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귀, 독고신, 이원, 후막진숭 등은 효민제와 밀모하여 우문호를 쫓아내려 했으나 우문호는 먼저 손을 써 이들을 모두 죽이고 효민제도 폐위시킨 뒤 우문태의 4남 우문옹을 보위에 올리니 이가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 무제이다.

 

우문호는 이후에도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관부를 장악한 뒤 다른 부府들도 천관부에 예속시켰다. 금위군도 자신의 사병으로 격하시켰으며 국가의 대소사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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