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의 난 제압한 북위 일인자 이주영 - 하음의 변 [74화]

남북조 시대 당시 6진 수용군 이주영은 영리했다. 반란군에 대해, 때로는 동조하거나 때로는 이들을 제압하면서 점차 자신의 힘을 키워나갔다. 하루는 사주를 지나던 중 자사 울경빈이 성문을 열고 영접하지 않자 성을 함몰시킨 뒤 스스로 자사를 배치했다. 북위 조정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는데,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태후 제압한 이주영

시간이 지날수록 북위 곳곳에서 반란이 심화하였다. 흉포한 영태후가 북위를 망치고 있던 것이었다. 수용군의 이주영은 틈을 타 세를 확장하기 위해 반군 진압에 나서겠다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매번 거절당했다.

이주영의 세력이 부담스러웠던 영태후는 군 내부의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이주영 휘하의 군신에게 녹봉을 내리려 했으나 이주영은 이를 간파하고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주영은 곧 북위 북쪽의 마읍, 정형 등을 봉쇄한 뒤 반란을 꾀한다.


이 와중에 영태후와 아들 효명제 사이는 점차 멀어졌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가 부담스러웠던 효명제는 마침내 이주영에게 입조를 권한다. 영태후의 총애를 받는 정엄과 서흘을 제거할 목적이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태후는 무태 원년(528) 4월 효명제를 독살한다.


남북조 시대 황제 독살은 북조만의 유구한 전통이라 ...


영태후는 반빈 소생의 황녀(효명제의 딸, 영태후의 손녀)를 황제로 세웠다가 이내 세 살의 임도왕 원교로 교체했다. 이주영으로선 효명제의 밀조를 받아 입조하거나, 효명제 독살을 명분으로 하여 입조하거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황상이 서거했다. 비록 19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 군주에 불과했다. 지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아를 다시 내세워 천하에 임하려고 하니 과연 나라가 태평할 수 있겠는가?"


이주영은 고환을 선봉으로 세워 장락왕 원자유를 옹립한 뒤 낙양으로 진격한다.


영태후는 측근 이신궤, 서흘, 정엄에게 이주영을 막게 했으나 싸우기도 전에 모두 도주하니 영태후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주영은 자신이 옹립한 원자유를 황위에 올리니, 이가 경종 효장제이다. 이주영은 영태후와 임도왕 원교를 산채로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키며 조정 대권을 장악한다.


이해인 530년. 제주, 하북, 유주, 평주, 관서 등의 반란군을 제압하며 오랜 기간 이어지던 남북조 시대 북위의 반란은 마침표를 찍는다.

이주영은 사지절, 시중, 도독중외제군사, 대장군, 개부, 겸상서령, 영군장군, 영좌우, 태원왕에 식읍2만 호를 얻어 명실공히 북위 최고의 일인자가 되었다.



이주천 이주영

이주영의 집안은 남북조 시대 대대로 이주천爾朱川으로 불리는 곳에서 살아온 까닭에 성을 이주로 삼았다. 현재는 갈족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으로 보고 있다.


이주영의 부친 이주신흥은 군공이 많아 죽기 직전 추장의 자리를 아들 이주영에게 넘기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주영은 추장이 되자마자 북위의 혼란스러운 정세와 맞물려 고비 사막에서 유연과 싸우고, 만자걸진, 걸복막우, 유아여, 북렬보약, 곡률낙양, 비야두 등 6진의 각종 반란까지 진압하며 위명을 떨쳤다. 당시 그는 남북조 시대 위장군, 북도도독, 사지절, 안북장군, 박릉군공에 식읍은 1,500호였다.


이주영은 처음부터 권력을 찬탈할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선비족의 반란군이 남진하는 것이나, 산동의 반군이 서쪽으로 진군해 소란이 커지는 것이나, 6진의 병사 처우를 개선하지 않는 문제 등 수많은 문제와 이에 따른 개선책을 조정에 계속해서 상서했지만 대부분 무시당했다. 이로 인해 이주영은 다른 마음을 품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영태후는 이주영이 반란을 제압하여 다른 마음을 품을까 두려워 병사 증원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군이 달아날 길을 터주는 등 이주영으로선 분노와 원한을 가질만한 조치만 골라서 취했었다. 무지한 영태후가 잠자던 용을 깨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음의 변

낙양 입성 후, 이주영이 효장제 원자유를 옹립하자 측근 비목이 권했다.


"명공의 휘하 병사는 1만 명도 안 됩니다. 도성으로 진격하는 와중에 아무도 막는 자가 없어 대승을 거둔 위엄이 전혀 없습니다. 이에 군신들이 은밀히 딴생각을 품고 명공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숙청을 가해 조정의 관원을 쇄신하지 않으면 안에서 변이 일어나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이주영은 효장제의 형인 팽성왕 원소와 동생 패성공 원자정을 하음으로 보내며 무상왕, 시평왕에 봉했다. 이어서 효장제에겐 하서에서 하음까지 순회할 것을 권했다. 행궁의 서북쪽에서 백관을 이끌고 가며 제천 행사를 한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북위 백관이 모이자 이주영이 외쳤다.


"천하가 어지럽게 되고 선황이 갑작스럽게 죽었으니 이는 모두 너희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이다! 조신들은 모두 탐학한 까닭에 응당 주살돼야 한다!"


그러고는 효장제가 있음에도 병사들을 풀어 승상 원옹, 사공 원흠, 의양왕 원략, 황문랑 왕준업 등 충신이든 간신이든 모조리 도륙했다. 무려 1,300여 명의 관료들이 목숨을 잃는다. (남북조 시대 하음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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