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징 고중밀로 시작된 4차 회전 망산지전 - 우문태와 위효관 [82화]

3차 하교지전(538) 이후 5년이 흐른 동위 효정제 무정 원년(543) 다시 전쟁의 불이 붙는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 유명한 망산지전이다. [주로 여기 참조]


전쟁의 원인은 고환의 아들 고징은 여색을 밝혀 고중밀(고오조의 형)의 처 이씨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비슷한 시기에 북예주 자사로 임명된 고중밀은 이같은 사실에 앙심을 품고 서위에 투항한다. 동위의 요충지 호뢰관이 서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동위와 서위의 네 번째 회전이 벌어진다.

▶ 말썽꾸러기 고징

훗날 남북조 시대 북제의 황제게 오르는 고징은 532년 효정제孝靜帝의 누이동생 풍익장공주馮翊長公主를 아내로 맞습니다. 고징은 14세 때 부친 고환이 총애하는 희첩 정대거와 간통했다가 부친에 의해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당시 사마자여가 중간에 개입해 이를 고발한 노비를 죽여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부자가 다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문태는 여러 장수를 이끌고 그를 맞이하고, 하교의 남성으로 진격한다.



고환은 고중밀이 반란을 하고 우문태가 침범해왔다는 말을 듣고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하북으로 막으러 갔다. 우문태의 군은 전상으로 물러가서 군사들에게 배를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상류에서 불을 질러 하교를 불태워서 고환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지 못 하도록 하려고 했다.


동위의 장령인 곡률금은 행태랑중 장량을 파견하여, 작은 배 백여 척으로 적선을 막고, 쇠사슬로 연결해서 강을 가로지르게 했고, 황하의 양안에 고정했다. 적선이 가까이 오지 못 하도록 해서 하교(河橋)의 안전을 보호했다. 고환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고 망산이라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했다. 그리고는 여러 날을 진격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우문태는 물자가 전곡에 남겨져 있어, 밤을 틈타, 정예부대를 이끌고 고환의 군대를 습격했다. 그런데 고환의 군대는 미리 눈치채고 전체 부대를 대기시켰다.

여명이 되자 과연 우문태의 군대가 왔다. 고환은 장수 팽락은 우문태의 부대가 진열을 정비하기 전에 수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우문태의 군대는 대패하여 도망쳤다. 고환의 군대는 이들을 쫓아서 전상까지 뒤쫓았다. 우문태는 병영을 버리고 다시 도망쳤다.


서위의 시중 대도독인 임조왕 원속, 촉군왕 원영종, 강하왕 원승, 거록왕 원선, 초군왕 원량, 첨사 조선등이 모두 포로로 잡혔고, 병사들 중 사상자가 6만여에 달하였다.


동위의 대장 팽락은 우문태를 급히 뒤쫓았다. 우문태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대장군 팽락이냐? 멍청한 남자로다. 생각해봐라. 오늘 내가 없어진다면, 내일 네가 있겠는가? 하루빨리 군영으로 가서 재물이나 챙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듣고 팽락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우문태를 뒤쫓지 않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누군가 팽락이 우문태를 놓아주었다고 고발했다.



고환은 대로하여 패검을 뽑아 팽락의 목에 세 번 내려치려다 세 번 들어 올리고는 결국 팽락을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늘 내가 너를 용서해주니 이전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공을 세워 속죄하라고 하였다. 팽락은 연신 명을 따르겠다고 응낙했다. 당시 팽락은 서위 임도왕 원간을 포함해 5명의 왕과 참모 등 48명을 포로로 잡은 큰 공로도 있었다.


우문태가 아직 살아있으므로, 고환은 감히 군대의 용장을 죽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양군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고환은 협격에 당해 보병을 모두 잃고 도주한다. 고환의 말은 활에 맞아 죽었는데 혁련양순이 자신의 말을 내줘 휘하의 7명만을 이끌고 다시 도주한다. 측근도독 위흥경이 목숨을 바쳐 적을 저지했으나 큰 소용은 없었고, 서위 하발승이 13명의 기병과 급히 그를 뒤쫓았다.

"하륙혼(고환의 자, 또는 선비어 이름), 나 하발파호(하발승의 자 파호)가 오늘 반드시 너를 잡고 말 것이다!"

고환을 수종 하던 자들이 간신히 활을 날려 하발승의 말을 죽인 덕분에 고환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동위군이 반격을 개시해 서위의 조귀 등이 패퇴하고 우문태는 간신히 위하 상류에 주둔할 수 있었다. 동위의 추격군은 섬주를 지나 항농의 서위군 곡식 창고에 이르렀다. 이를 지키던 왕사정은 오히려 성문을 열고 옷을 벗은 뒤 성루 위에 눕는 담략을 과시하자 동위군은 매복을 의식해 퇴각한다.


왕사정의 높은 명성과 담략에 스스로 놀랐던 것이다. 아마도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을 때 이것을 모티브로 어떤 장면을 각색했던 건 아닐지.



이날 서위의 중군, 우군이 연합하여 동위를 격패시켰으나, 좌군이 패배했다. 우문태는 전체적으로 불리해지자 병력을 이끌고 관내로 물러갔다.


망산지전에서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서위는 경령귀, 왕호인, 왕문달의 세 장군에게 상을 내렸다. 우문태는 이때 비로소 관중 사람들이 용맹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널리 병사를 뽑아서 군대에 충당시켰고, 남북조 시대 부병제를 창립하여 병사들을 백성들 속에 들여보냈다. 일단 필요하면 그들을 소집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조 시대 관료제도도 개혁하여 선비식 제도를 한족식 제도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족의 정책을 쓰면서 저족을 압박하여 국력을 크게 강화했다.


업성으로 돌아온 고환은 고중밀 일족을 도살했다. 그리고 고징은 고중밀의 처 이씨를 찾아가 물었다.

"오늘은 과연 어떠한가?"

이씨가 입을 다물자 고징은 이씨를 첩으로 삼았다.


동위 무정 2년(544), 고환은 훈귀를 제거한다. 군공으로 벼락출세한 훈귀들을 내쫓고 그 자리를 한인 귀족들로 채웠다. 훈귀들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관련 인사들을 투옥하거나 면직시켰고, 심한 경우 목을 베기도 했다. 당시 후경도 대상이었으나 관직을 낮추는 것으로 종결되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추측된다.


한편, 북방의 실위의 사신 장언두벌張焉豆伐이 입조했다. 북위의 분열과는 별개로 여전히 동위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 이민족들의 공물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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