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후경 3일 천하와 양나라 진패선 왕승변의 분전 [90화]

양나라 권력을 장악했던 후경은 자신도 연이어 패배하고 전선의 휘하 장수들의 패전 소식이 계속 전해오자 온종일 술을 마시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당시 율양공주와 왕위는 서로를 후경 앞에서 헐뜯었다. 사태가 불리하게 흐르자 왕위는 간문제를 제거하고 속히 보위에 오를 것을 권했다.

"자고로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폐립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위세를 보여 줄 수 있고, 양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즈음,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붙잡힌 안지추는 양나라 건강으로 끌려와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술회했다.

"포로가 되어 옛 땅 건강에 돌아와 보니, 이곳은 오랑캐 놈에 짓밟혀 있다. 선조의 사당을 보니 폐허가 된 수도를 마음 아파하는 옛 서리의 시가 떠오르고, 황폐한 마을을 보니 무너진 은나라의 수도를 영탄하는 맥추의 노래가 생각나 서럽다.


군대의 북은 엎어져 사용하는 이 없고, 일찍이 위대한 공훈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종도 부서져 땅에 떨어진 채로 있다. 들판은 온통 바싹 말라 시들고, 인골은 널브러져 있고, 마을은 인적이 끊겨 퇴락하고, 밥 짓는 연기도 보이지 않네.


옛날 백가의 명족들, 지금은 친족 모두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어딘가에서 살며시 왕소군의 비애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고, 수치를 당한 귀부인의 한스러운 거문고 소리가 들린다."

이후, 후경은 왕위의 계책을 따라 간문제 대보 2년(551) 8월, 예장왕 소동을 보위에 올리고 건강성과 경구, 영군, 회계, 고숙 등지의 종실들을 살해했다. 이어 이전 태자 소대기를 죽인다.

"이 일이 있을 것을 오래전에 알았다. 다만 이처럼 늦은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소대기가 휘장의 끈에 목이 졸라 살해된 데 이어, 같은 해 11월엔 영복성에 유폐시킨 간문제도 살해된다. 왕위 등은 그를 대취하게 만든 뒤 흙 가마니를 머리 위에 덮어 압살했다. "실로 쾌락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후경의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11월 중, 스스로 구석을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동에게 보위를 넘겨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한漢) 왕위는 종묘를 세우기 위해 7대 선조의 위패를 모셔야 했지만, 후경은 부친 후표와 조부 을우주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왕위는 임의로 이름을 만들어 위패에 금칠한 뒤 종묘에 모셨다.


한나라 황제가 된 후경은 황제의 어복과 도포, 용상, 장화 등이 너무 불편했고 평소처럼 궐내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며 새총으로 새를 잡는 것을 즐겼다. 왕위로선 이를 멈추라 권하고 사사로운 출궁도 막았다. 승상으로 서주에 있을 땐 문을 활짝 열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황제가 된 뒤론 가벼이 출궁할 수 없고 여러 사람을 만나지 못해 휘하 제장들이 원망을 품게 됐다.


후경 태시 2년(552) 3월, 양나라 왕승변을 필두로 각자에서 모인 군사들이 심양으로 출발했다. 후경의 부하였다가 소역에게 투항한 후진은 남릉과 작두의 두 보루를 얻었으나, 유신무는 동양에서 후경의 사답에게 패해 생포되어 건강으로 보내진다. 유신무는 일전에 후경을 배신했었기에 발가락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마디마디 끊어지는 참형을 당했다.


왕승변은 무호를 함락시키고 강상에서 10여 일 동안 정박하며 한나라 후경의 장수 후자감의 자만심을 키워놓은 뒤 수전에서 대승을 거둬 건강 교외의 선령사에 이르렀다. 후자감은 패잔병을 모아 동부에 다시 집결했다. 당시 진패선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회수 북안으로 들어가 석두성 서쪽의 낙성산에 목책을 세웠다.



한나라 후경의 태시 2년(552) 3월 19일, 후경이 1만여 군사와 철기 8백여 기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양나라 진패선은 군사를 나눠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사용해 성공한다. 석두성을 지키던 후경의 장수 노휘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성문을 열어 투항했으며, 후경도 대성에 이르렀다가 일이 틀어졌다 판단하고 측근과 함께 1백여 기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주했다.

"나는 옛날 하발승을 대파하고, 갈영을 깨뜨려 하삭 일대에 명성을 떨쳤다. 이후 장강을 건너 대성을 평정하고, 유중례를 항복시켰으니 이는 손을 뒤집듯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형세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다!"

후진은 맹추격하여 송강에서 그 일행을 따라잡아 측근인 팽준을 사로잡는다. 후진은 이전에 후경이 자신의 일족을 도륙했기에 팽준의 배를 가른 뒤 내장을 꺼내 서서히 죽게 하였다. 한나라 황제 후경은 겨우 수십 명만 대동한 채 배를 타고 도주했다. 정신없이 도주하는 와중에 후경이 배 안에서 코를 골고 잘 때였다. 양곤, 왕원례, 사위유 등은 모의 끝에 그를 죽이고 시체 뱃속에 소금을 가득 채워 건강으로 보냈다.



건강의 왕승변은 후경의 시체를 확인한 뒤 강릉의 소역에게 보냈다. 시체 일부는 건강성 안에 버려졌고 율양공주가 낳은 후경의 자식도 거리에서 기름에 튀겨지는 팽살을 당했다. 한편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다섯 아들도 하나둘 살해됐다. 큰아들은 후경의 난 때, 얼굴 껍질이 벗겨진 뒤 기름에 튀겨졌고 나머지 4명은 거세됐다.


이후 고양이 보위에 오른 뒤엔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거세당한 4명도 기름에 튀겨져 죽는다. 소역은 후경의 책사인 왕위, 품계략, 주석진을 강릉에서 참수한다.


얼마 뒤, 소역은 황제인 소동과 그의 형제를 죽이고 양나라 보위에 오르니 그가 원제이다(승성 원년(552)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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