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요약 - 어린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는 동진. 군공을 세우는 환온 유익은 야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형주의 관청에서 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막료들과 나눈 대화는 이렇다. "나는 한나라 고조라든가 위나라 무제(조조)가 되고자 하는데 어떠하오?" "(장사 강반이 말하길) 공께서는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같은 사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고조나 위무제와 같은 분이 되시는 것은 원하지 아니합니다." 함강 8년(342), 성제 사마연이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유량의 동생이자 외숙인 유빙이 성제의 친동생인 사마악, 강제를 즉위시킨다. 유량 사후, 손작孫綽이 그를 위해 비문을 지었다. "유공은 원래부터 기꺼이 세속 밖에다 마음을 두고 있었다. 유연한 태도로 세상을 살면서 몸을 도회韜晦(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숨..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조약의난 종결, 동진 군벌 해체, 위진남북조 성한 [32화] 10월 중엔 왕도가 변심한 소준의 심복 노영의 안내로 유량이 주둔하고 있는 백석으로 달아나는 등 전황은 소준에게 불리해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소준의 병사들은 동진의 군대에 계속 승리를 거뒀다. 당시 온교는 군량이 떨어져 도간에게 빌리기도 하는 등 전황은 되려 포위한 쪽이 수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준은 계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건강 주변의 포위군 영채를 공격했다. 온교와 도간 등은 보병전에 익숙지 않으니 석두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펼쳤으나 소준의 아들 소석과 용장 광효의 수십 기에 대패했다. 수십 기가 1만여 명의 보병을 낮은 곳에서 위로 향하며 격파한 것이다. 큰..
동진 군벌 소준의난, 명제 사마연과 외할아버지 유량 [31화] 유량은 회수 일대가 공략당하자 왕도를 대사마로 임명해 이를 막도록 하는 한편, 후조의 군대와 맞서며 전장에 있던 소준의 병권을 빼앗으려 시도한다. "소준은 승냥이의 야심을 지니고 있어 끝내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역모를 부추기는 발언)" 광록대부 변호가 반대했다. "소준은 강병을 이끌고 하루 만에 경성에 이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주둔하고 있소. 만일 변이 일어나면 화난이 가볍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유량은 이런 말을 가볍게 skip하고 밀어붙인다. 명예직에 임명해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군권을 소준의 동생 소일에게 넘기려 했다. 유량에게 압박을 받던 소준은 휘하의 사마를 유량에게 보낸다. "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중임을 맡고 있으..
어린 황제 성제 사마연 및 반역자 왕돈, 할아버지 유량 [30화] 반역자 왕돈은 태녕 2년(324) 8월, 온교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5만 명의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재차 건강으로 진군한다.명제 사마소는 대범하게도 말을 타고 고숙까지 이동해 반역자 왕돈의 병력 상황 등을 살피는 등 문무를 겸비한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한번은 몰래 군대의 형세를 정찰하려고 고숙까지 이르렀는데 반역자 왕돈 군영의 병사가 이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돈은 누워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누런 수염의 선비족 놈이 온 것이다." 동진 황제 사마소의 친모가 연나라 사람이라 그렇게 말은 했으나 추격하여 잡아내진 못했다. 이후 반역자 왕돈은 왕함에게 월성으로 향하도록 명했으나..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동진 왕돈 반란 성공, 허수아비 황제 사마예 [28화] 진원제 대흥 4년(321),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대연에겐 사주, 연주, 예주, 병주, 옹주, 기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고,유외는 진북장군 겸 청주, 서주, 유주, 평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동진 원제는 후조의 석륵을 서와 북에서 막는다는 취지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으론 왕돈 반란을 미리 방비하려 한 것이다. 진원제 영창 원년(326), 왕돈이 마침내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건강을 향해 진군한다. 왕돈은 상주자사 사마승을 설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슷한 시기 사마예는 유외와 대연에게 건강을 지킬 것을 명한다. 당시 건강의 대신들은 왕돈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주의 등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조정의 대책..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 사마예 동진 건국 [27화] 이 직전에 『진민제는 한나라(흉노 유연이 세운 국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장안 함락 전 사마예에게 이런 친서를 보낸다. "짐은 지금 궁지에 몰려 성에 유폐돼 온갖 걱정이 든다. 만일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날이면 승상이 가히 만기를 통섭해 낙양을 되찾고 종묘를 수복함으로써 이 치욕을 설욕하기 바란다." 사마예는 사마업이 포로로 잡히자 보위에 오르진 않았지만 진민제 건흥 6년(317)에 진민제가 피살되자 유곤, 단필제, 단진, 소속 등의 상표로 보위에 올랐다. 사마예가 동진의 창업주 진원제元帝이다. 동진 건국 이전에 이미 왕씨들이 강남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상태였다. 왕돈은 호북, 호남을 비롯한 양자강 중류, 왕도는 양자강 하류를 ..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석민 등의 한족은 호인들은 이들이 나가봐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 되리라 판단하고 살호령을 내린다. 한족 장병들이 호인들을 도륙해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업성 인근 지에서의 도륙까지 합치면 그 수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또한 이전에 기주 일대로 강제로 이주당한 수백만의 호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서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으며 굶주림과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열에 두셋에 지나지 않았으며 들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살호령에 격분해 여음왕 석곤이 태위 장거 등과 업성을 공격했으나 무예가 뛰어난 석민과 이농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되려 대장 장하도 등을 잃..
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태녕 원년(349) 5월, 석호의 아들이자 정실 소생으론 둘째인 석준이 황위에 올랐다. 석준은 곧 석씨 일가를 요직에 배치하며 제후왕들을 위로한다. 유황후와 장시에게 살해당한 석빈의 아들 석연을 황태자로 삼고 석감을 시중, 석충을 태보, 석포를 대사마, 석곤을 대장군,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했으며 자신이 보위에 오르도록 공을 세운 이농도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시켰다. 당시 석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종실 제후왕들 또한 많았다. 계성의 패왕 석충은 5만의 정병으로 업성으로 진군했는데 업성에 다다르자 군세는 10만에 육박했다. 석준은 석충에게 친서를 보내며 형제의 우애를 역설하며 중병을 거느리는 것을 승인한다 했다. 석충은 형제의 의를 생..
후조 왕자의 난, 석수 석도 석세 석준, 흉노 유씨 후예 [22화] 후조 건무 14년(348) 9월, 하루는 석호가 석선이 마음에 안 들어 석도를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는 말을 했다. 이에 석도는 기뻐한 나머지 자신의 태위부에 선광전을 지으며 자축했다. 석선은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선광전을 둘러보던 중 선광전의 宣이 눈에 띄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에 선광전을 지은 장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선광전 마저 불살랐다. 얼마 후, 몰래 양배, 모성, 조생 등을 보내 동생 석도를 죽였다. 이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석선이 황제가 되면 석도의 봉지를 넘겨주겠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석호도 석선과 석도의 반목을 모르진 않았다. 석호는 이를 그냥 넘기려 했는지 눈에 띄는 후계자가 있으면..
후조 대조천왕 석호의 태자 문제, 고구려 공격, 장안 증축 [21화] 후조 건무 3년(337), 안정의 후자광이 스스로 불태자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석광에게 제압당한다. 후자광은 대진국(로마)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를 빙자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은 특이하다 할 수 있겠다. 석호는 불교를 신봉하여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을 크게 대우했는데 사공 이농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게 했고 조회가 열리는 날에는 태자와 여러 공작이 불도징을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게 하는 등 후조 전역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었다. 불도징은 이후 석호가 황태자 석수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석호는 대조천왕을 칭하며 석수를 황태자로 삼았다. 석수는 황태자에 책봉된 뒤 여인을 납치, 강..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
갈족 석륵 조나라(후조) 건국, 남북조 시대 성군 등장 [18화] 이즈음, 진나라 유곤은 석륵의 모친과 조카 석호를 얻는다(저족이 하도 이곳저곳으로 분산되어 살다 보니 이 둘이 어찌어찌 그리하여 유곤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으로 예측됨). 그리곤 이 둘을 송환하면서 장문의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장군은 예주와 연주를 석권한 뒤, 강회 일대를 횡행하고 한면(한수와 면수)을 위협하니 .... 유총을 배반하는 것은 화를 제거하는 것이고 진나라를 좇는 것은 복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당연히 석륵은 무시하고 갈피에서 큰 배를 건조해 장차 『건업을 도모』할 뜻을 비쳤다. 예전 조조가 그러했듯 석륵에게도 불운이 찾아온다. 회수 일대에서 석 달간 장대비가 연이어 내리면서 북방의 기후에 익숙한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렸..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해 유연에게 몸을 맡겼으니 석륵이 큰 인물이라 판단한 유연은 그에게 장군의 직을 내렸고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를 10여 년,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석륵은 유연의 한나라 휘하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나 처음부터 독립할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망을 쌓는 데도 주력했다. 약탈은 물론이고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절대 금했으며 기주를 함락한 뒤에는 군자영을 세워 문인들을 길러냈다. 석륵의 수하였던 장빈도 이런 군자영에 스스로 찾아간 인물이었다. 유총이 황제가 되자 석륵은 다시 정동대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낙양을 칠 때, 양양으로 진격해 장강과 한수 이북의 거점을 얻어냈..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광초 2년(319) 여름, 유요는 조서를 내린다. "나의 선조는 북방에서 일어났다. 광문제(유연)가 한나라 종묘를 세워 백성의 뜻을 좇았다. 지금 의당 국호를 바꾸고 선우를 선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호를 조로 바꾼 이후 진창, 초벽, 안정, 농성 등을 함락시키고 관중의 파족, 저족, 강족, 갈족 등을 제압했으며 태학과 소학을 세워 학자들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했고, 궁실을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 중단하기도 했다. 현명하게 내실을 다지던 유요는 광초 8년(325), 드디어 석륵의 조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시작한다. 석륵이 장수 석타에게 명해 상군을 쳐 3천여 명의 포로와 소와 양 등 가축 2만여 두를 빼앗은 것이다. ..
화북 쟁탈전 - 유요 근준 석륵 삼국지, 두개의 조나라 [15화] 연이어 적국의 황제 두 명을 사로잡은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총은 이에 더욱더 사치에 힘썼다(?). 수렵하며 술을 마시는 것 외에 그가 즐긴 것은 각 대신의 집을 차례로 돌며 미인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호군 근준의 집에서 그의 두 딸 근월광과 근월화 모두 미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 곧바로 귀빈으로 삼았다. 그리고 몇 달 후 근월광을 황후로 세웠다. 천하가 한나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렇지만 한나라엔 건국자 유연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여전히 존재했다. 왕준, 석륵 등의 대장군들을 조정에서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전히 한나라에게 큰 문제였으며, 결국에 해결하지 못했기에 후조가 탄생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유총..
사마월 진회제 민제 최후, 한나라 유총 사치향락 빠지다 [14화] "지금 호로胡虜들이 낙양 근교까지 다가왔는데 모두 지킬 뜻이 없소. 조정은 모두 그대만을 믿고 있는데 어찌 지금 군사를 이끌고 멀리 출정하겠다는 것이오? 낙양을 포기하려는 것이오?" 진회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월은 석륵을 토벌해 조정의 권위를 다시 세우겠다며 기어코 출병한다. 누가 봐도 임지인 동해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며 낙양은 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낙양의 수비병』은 거의 없어지고 기근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마월이 남긴 장수들은 공경들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공주들을 능욕하기까지 한다. 진회제는 참을 수 없어 구희에게 사마월 토벌을 명하는 밀조를 내렸고 그나마 사마월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서진의 마지막 숨통은 그의 폭사와 함..
흉노족 한나라 건국, 유총에게 포위당한 서진 진혜제 [13화] 유연으로선 제후왕들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거사를 일으키기 좋다는 판단을 했다. "지금 우리는 강병 10만 명이 있으니 모두 일당십의 용사들이오. 북을 울리며 진나라를 멸합시다. 잘되면 한고조의 대업을 이루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지라도 조조의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한나라는 오랫동안 천하를 다스리면서 은덕을 베풀었소. 명분으로 말하면 나는 한실의 생질에 해당하오. 형이 패망한 상황에서 동생이 뒤를 잇는 게 정리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오." 이렇게 5호의 첫 국가 한漢나라가 건국된다. 흉노 유연은 진혜제 영흥 원년(304), 좌국성에서 한왕을 칭하며 한나라 제도를 좇아 백관의 제도를 정했다. 16국 중 첫 왕조의 건국이었다. 한나..
한나라 건국 시조 위진남북조 흉노 유연, 사마영 실수 [12화] 후한 건안 21년(216), 조조가 흉노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좌, 우, 남, 북, 중앙의 5부로 나눠 부마다 1명의 도위를 두고 중앙에선 사마를 파견해 이들을 감독했다. 1만여 부락민을 거느린 좌부는 부씨현(산서성 임분현)에 거주.6천여 부락민을 거느린 우부는 기현(산서성 기현)에 거주.6천여 부락의 중부는 대릉현(산서성 문수현)에 거주. 이로써 분수 일대는 남흉노 3만여 부락이 사살싱 점령한 셈이 되었다. 중원으로 들어온 흉노 19개 부족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도각, 강서, 노수호 부족이 있었다. 이중 도각부는 한고조 시절부터 흉노로 공주들을 시집보냈기에 귀족들이 유劉를 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에서 오래 살았던 탓에 한화가 많이..
중원으로 진출한 강남 사족, 호족들과 육손 손자 육기 육운 [11화] 한편으론, 변방으로 취급받던 강남 사족들의 중원 진출도 빈번했다. 중원은 중국의 중심이고 아직 발전이 더뎠던 강남의 사족들은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사대부들의 무시를 받기 일쑤였다. 당시 『중원으로 이주』한 강남 사족을 대표하는 이가 육손의 손자이며 육항의 아들이었던 육기, 육운 형제였다. 오나라가 멸망하자 사공 장화는 명망이 높던 저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륙(육기, 육운)은 용이 강한江漢에서 뛰어오른 것 같고, 언선(고영)은 봉이 조양朝陽에서 우는 것 같았소." 그럼에도 중원 명문가들은 강남 사족들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 육기가 처음 낙양에 갔을 때 장화에게 자신이 앞으로 인사하러 가야 할 곳을 물었는데 유보가 그..
서진 말기 화북 농경 지대, 위진남북조 시대 강남 호족 [10화] 발췌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 가와카쓰 요시오, 혜안출판사 중국 본토는 대게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북과 이남으로 크게 나뉜다. 회수 이북은 개활지라 명명되며 건조도가 높아 삼림이 충분히 생육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삼림이 자란다 하더라도 일단 한 번 채벌되면 재생되기 어렵다. 따라서, 회수 이북에는 삼림지대가 형성되기 힘들었고, 이에 『울창한 삼림』에 방해를 받지 않은 화북의 대평원은 전망이 좋고, 공간이 열려 있어 집단의 이동이 쉬웠다. 또한 치수가 어렵기로 유명한 황하의 물을 거의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여서, 소규모 관개와 자연의 천수를 주로 이용하는 소위 소관개 천수 농경 지대였다. 뜻밖에 농사에 가혹한 환경에 처한 ..
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 잔혹했던 왕준은 업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으며 선비족 사병들이 약탈한 부녀가 행군에 걸림돌이 되자 역수에 밀어 넣어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자만 8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의 기병에 대한 공포가 천하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양을 점거했던 장방 또한 매우 교만했다. 낙양 일대를 약탈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후궁과 궁녀들을 겁탈하거나 황실의 귀중품을 훔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진혜제를 압박해 사마영의 황태제 신분을 폐하고 예장왕 사마치를 황태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리게 했으며 함부로 장안 천도를 거행했다. 진혜제의 형제는 25명이었으나 이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사마영과 사마치, 오왕 사마안 밖에 ..
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장사왕 사마예는 1백여의 선봉대를 이끌고 진혜제를 손안에 넣은 뒤 제왕 사마경을 공격했다. 제왕 사마경은 : "장사왕이 조서를 멋대로 고쳤다."장사왕 사마예는 : "대사마 제왕이 모반했다." 라고 서로를 모함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너무 많은 화살이 빗발쳐 어전으로도 유시가 들어왔고 몇몇 군신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이런 격렬한 사흘간의 전투 끝에 제왕 사마경은 휘하의 장사 조연에게 체포돼 궁 안으로 보내졌다. 혜제는 복위에 힘쓴 그를 살려주고자 했으나 사마예는 사마경을 죽이고야 만다. 이내 평화가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으나 사소한 이유로 장사 이함이 사마예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간왕 사마옹은 성도왕 사마영과 반년만에 다..
사마륜의 짧은 집권기, 제왕 경, 성도왕 영, 하간왕 옹의 분열 [7화] 당시 황궁의 진혜제에게 진준이란 자가 고했다. "응당 사람을 시켜 백호번(싸움을 독려한다는 뜻)을 들고 밖으로 나가 싸움을 말려야 합니다." 상국부에 있던 태자좌솔 진휘의 형인 진준은 동생처럼 회남왕 사마윤을 지지하던 자였다. 당시엔 싸움을 말리는 추우번을 들고 가라 말했어야 했는데 우매한 진혜제는 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준은 일부러 거꾸로 말을 해 상국부를 포위한 사마윤의 군대에 힘을 보태려는 심산이었다. 사마도호 복윤은 곧 백호번을 들고 상국부로 향했다. 이때 사마륜의 아들 여음왕 사마건이 복윤에게 애원했다. "장차 부귀를 그대와 함께하겠소!" 복윤은 이 말을 믿고 사마윤에게 찾아가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 명했다. 사..
가황후를 축출한 승자 사마륜, 태자 사마휼의 억울한 죽음 [6화] 원강 9년(299), 가황후는 미남자로 유명했단 반악에게 태자의 필체를 흉내 내 모반의 글을 쓰도록 한다. "폐하는 응당 스스로 명을 끊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태자인 내가 대신할 수밖에 없다. 생모인 사숙비와 함께 날짜 안에 동시에 행하기로 약조했으니 의심하며 머뭇거리지 마라." 다음 날 아침, 가남풍 황제가 병이 났다는 이유로 태자에게 입조를 명했다. 가황후는 시비 진무를 시켜 술 3되와 대추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가 태자에게 마시게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던 사마휼은 공복에 술을 마셨다가 실수할까 두렵다며 사양했다. 가황후는 당연히 질책한다. "너는 어찌 이처럼 불효한가? 부모가 술을 내려도 마시지 않으니 술에 무엇이라도 들..
사마의 막내 아들 사마륜과 가밀 사마휼의 대결, 강통의 사융론 궁중 암투로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강통은 사융론을 올리며 5호(흉노, 선비, 저족, 갈족, 강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괴이한 기풍으로 극도로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흉포하고 사나운 데다 인정도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힘이 약하면 우리를 두려워하며 복종하나 강하면 곧바로 침략하며 반기를 듭니다... ... 지금 화하의 사서士庶가 저들을 업신여기자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반드시 틈을 보아 흉포한 성정을 드러낼 터이니 지금 저들이 피폐하고 우리의 무력이 성한 때를 이용해 저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쫓아내느니만 못합니다." 사마의가 살아있었더라면 강통의 사융론을 받아들였을까? (특이하게 동진 16국 시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훗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