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 잔혹했던 왕준은 업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으며 선비족 사병들이 약탈한 부녀가 행군에 걸림돌이 되자 역수에 밀어 넣어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자만 8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의 기병에 대한 공포가 천하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양을 점거했던 장방 또한 매우 교만했다. 낙양 일대를 약탈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후궁과 궁녀들을 겁탈하거나 황실의 귀중품을 훔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진혜제를 압박해 사마영의 황태제 신분을 폐하고 예장왕 사마치를 황태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리게 했으며 함부로 장안 천도를 거행했다. 진혜제의 형제는 25명이었으나 이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사마영과 사마치, 오왕 사마안 밖에 ..
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장사왕 사마예는 1백여의 선봉대를 이끌고 진혜제를 손안에 넣은 뒤 제왕 사마경을 공격했다. 제왕 사마경은 : "장사왕이 조서를 멋대로 고쳤다."장사왕 사마예는 : "대사마 제왕이 모반했다." 라고 서로를 모함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너무 많은 화살이 빗발쳐 어전으로도 유시가 들어왔고 몇몇 군신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이런 격렬한 사흘간의 전투 끝에 제왕 사마경은 휘하의 장사 조연에게 체포돼 궁 안으로 보내졌다. 혜제는 복위에 힘쓴 그를 살려주고자 했으나 사마예는 사마경을 죽이고야 만다. 이내 평화가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으나 사소한 이유로 장사 이함이 사마예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간왕 사마옹은 성도왕 사마영과 반년만에 다..
사마륜의 짧은 집권기, 제왕 경, 성도왕 영, 하간왕 옹의 분열 [7화] 당시 황궁의 진혜제에게 진준이란 자가 고했다. "응당 사람을 시켜 백호번(싸움을 독려한다는 뜻)을 들고 밖으로 나가 싸움을 말려야 합니다." 상국부에 있던 태자좌솔 진휘의 형인 진준은 동생처럼 회남왕 사마윤을 지지하던 자였다. 당시엔 싸움을 말리는 추우번을 들고 가라 말했어야 했는데 우매한 진혜제는 이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준은 일부러 거꾸로 말을 해 상국부를 포위한 사마윤의 군대에 힘을 보태려는 심산이었다. 사마도호 복윤은 곧 백호번을 들고 상국부로 향했다. 이때 사마륜의 아들 여음왕 사마건이 복윤에게 애원했다. "장차 부귀를 그대와 함께하겠소!" 복윤은 이 말을 믿고 사마윤에게 찾아가 황제의 조서를 받으라 명했다. 사..
가황후를 축출한 승자 사마륜, 태자 사마휼의 억울한 죽음 [6화] 원강 9년(299), 가황후는 미남자로 유명했단 반악에게 태자의 필체를 흉내 내 모반의 글을 쓰도록 한다. "폐하는 응당 스스로 명을 끊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태자인 내가 대신할 수밖에 없다. 생모인 사숙비와 함께 날짜 안에 동시에 행하기로 약조했으니 의심하며 머뭇거리지 마라." 다음 날 아침, 가남풍 황제가 병이 났다는 이유로 태자에게 입조를 명했다. 가황후는 시비 진무를 시켜 술 3되와 대추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가 태자에게 마시게 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던 사마휼은 공복에 술을 마셨다가 실수할까 두렵다며 사양했다. 가황후는 당연히 질책한다. "너는 어찌 이처럼 불효한가? 부모가 술을 내려도 마시지 않으니 술에 무엇이라도 들..
사마의 막내 아들 사마륜과 가밀 사마휼의 대결, 강통의 사융론 궁중 암투로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강통은 사융론을 올리며 5호(흉노, 선비, 저족, 갈족, 강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괴이한 기풍으로 극도로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흉포하고 사나운 데다 인정도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은 힘이 약하면 우리를 두려워하며 복종하나 강하면 곧바로 침략하며 반기를 듭니다... ... 지금 화하의 사서士庶가 저들을 업신여기자 그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반드시 틈을 보아 흉포한 성정을 드러낼 터이니 지금 저들이 피폐하고 우리의 무력이 성한 때를 이용해 저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쫓아내느니만 못합니다." 사마의가 살아있었더라면 강통의 사융론을 받아들였을까? (특이하게 동진 16국 시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훗날..
위진남북조 4화. 팔왕의난 1차전, 사마량 사마위 폐출과 승자 가남풍 사마량은 태보 위관과 친했는데 사마위의 호전적인 성격을 꺼려 병권을 빼앗은 뒤 봉지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팔왕의난을 불러온 작은 사건이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사마위는 크게 분노했고 공손굉, 기성, 이조를 황후 가남풍에게 보내 사마량과 위관의 모반을 고한다. 이전에 가남풍은 위관이 사마염 앞에서 사마충이 보위를 잇기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기에 앙심을 품고 곧 남편에게 조서를 만들게 한다. 위관은 예전에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한 것을 기회로 하여 무제의 옥좌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아뢰었다. "신은 아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공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오?" 위관은 하려던 말을 그만두기 세 차례에 이르렀다. 그리고 ..
위진남북조03. 가남풍의 정권 장악, 제거된 양준 일파, 석륵의 봉기 준비 초왕 사마위(진무제 사마염의 5남)가 입경한 지 얼마 안 된 「진혜제 원강 원년(291) 4월」, 서진 황제 진혜제 사마충은 이조와 맹관이 내민 조서에 서명했다. 백치 황제 사마충은 그 내용도 잘 모른 체 서명을 닦달하는 신하의 청에 못 이겨 일단 서명부터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준을 위시한 양씨 일가가 모반을 획책했으니 이를 제압(도륙해라)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양준이 모반을 꾀했다면 양황후를 먼저 찾았거나 양씨 일가의 누구라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남풍의 정치적 술수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곧, 조서의 내용대로 서진 초왕 사마위는 사마문에 군사를 배치하고 동안공 사마요는 금군을 이끌고 ..
위진남북조02. 팔왕의난을 유발한 서진 황제 사마충 [사마유 억울함] 귀가 얇았던 진무제 사마염의 실수는 크게 아래와 같다. 이 실수로 위진남북조 시대(팔왕의난)가 시작되었다. 1. 사마염은, 부부의 금실이 좋아 양황후의 말만 듣고 사마충을 후계자로 선택했으며, 가남풍을 내치지 않았다.2. 사마염은, 귀가 얇아 가남풍을 맞아들이고 사마충의 어리석은 행동들을 애써 무시했다.3. 사마염은, 사마휼에게 큰 기대를 했는데, 그 이유로 가남풍이 사마휼을 타락하게 만든 뒤 죽였다.4. 사마염은, 훗날의 정쟁을 예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 사마염 생전처럼 가씨와 양씨는 손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또 한가지 추가하자면 동생 사마유를 억울하게 죽게 만든 일이다. 총명하며 가뭄이 들면 스스로 반찬..
위진남북조01. 진무제 사마염 사치향락, 백치 사마충 (서진 쇠퇴)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위진남북조 진나라晉의 창업자 진무제 사마염은 자신의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한다. 천하 통일 이후에 권문세가의 사치 풍조를 막기는커녕, 자신도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 후궁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으니 서진은 통일과 함께 멸망의 징조가 드러난 셈이다. (진나라, 서진과 오나라, 삼국시대 말기)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의 은사隱士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이야말로 신이다" 유송 시절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태치汰侈 편이 존재한다. 때찌,, 때찌 때찌 해줄 만한 낭비와 사치에 대한 내용인데 주인공은 무제의 외숙 왕개, 창업 공신 석포의 아들 석숭,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운 왕혼의 아들로 진..
위진남북조00. 팔왕의난에서 수나라 통일까지 위진남북조시대를 위한 변명 中, 5호 16국이라고 불리는 시대는 팔왕의난 초기, 5부部 흉노의 맹주 유연이 한왕漢이라고 칭한 서진 건무 원년(304)부터 439년 북위의 세조 태무제의 화북 통일까지 135~136년 동안을 말한다. (수나라 통일 이전) 당나라의 역사가 이연수는 남사와 북사를 저술하면서 남사는 송 영초 원년에서 진陳의 정명 2년(589)까지 송, 제, 양, 진 4개 왕조의 170년, 북사는 북위 등국 원년(386)에서 수의 의령 2년까지 북위, 서위, 북주, 동위, 북제의 244년 동안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연유해서 이 시대를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 팔왕의난, 5호 16국, 남북조, 이 명칭에 대해선 여지가 없습니다. 진 -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