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악 죽음위진남북조 시대, 장안에서 두 군대가 합세하자 심전자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왕진악이 남방 병사를 몰살하고 장안에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병사들이 서로를 의심했고, 왕진악은 심전자의 요청으로 부홍지의 대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부홍지는 없고 심전자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곧이어 심씨 일족인 심경인이 왕진악의 목을 베고, 왕진악의 형제와 사촌 등 7명을 더 죽였다. "유태위의 명을 받아 모반을 주도한 왕진악을 주살했다!" 부홍지는 심전자가 졸지에 자신의 영채 안에서 왕진악을 죽이자 매우 놀라 유의진에게 알렸다. 막료장 왕수 등은 심전자 일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안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아무 까닭 없이 대장을 죽인 죄로 그의 목을 베었다. 부홍지가 지양에서 혁련괴의 ..
의희 13년(417) 2월, 유유가 팽성을 출발했다. 왕진악과 단도제 등은 이미 동관에서 후진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진은 전황이 끊임없이 불리해지자 북위에 원군을 요청한다. 당시 북위 조정에선 반대 여론이 강했고, 대신 최호도 이같이 말했다. "요흥은 이미 죽었고, 요홍은 나약합니다. 지금 유연柔然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유유와 싸우게 되면 남북으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됩니다. 유유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을 서쪽으로 보낸 뒤 군사들을 요소에 배치해 동쪽을 지키면 됩니다. 만일 유유가 승리하면 우리가 길을 빌려준 것에 고마워할 것이고, 만일 패하면 저들이 철군할 때 공격을 가함으로써 요씨의 진나라를 도와줬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북위 원제는 이를 듣지 않고 원군을 보냈다. 처음..
무리수를 둔 유의유유와 함께 환현을 토벌했던 유의는 처음에 유유와 대등한 위치였으나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유의는 이에 조정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자 끊임없이 더 많은 군권을 요구했다. 물론, 유유가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유가 노순의 반란을 제압하고 입경하니 조정 내부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전환된다. 의희 8년 (412), 형주자사 유도규가 노환을 이유로 퇴임하자 유의는 형, 영, 진, 옹주 4개 주의 군사를 총괄했고 이후에도 자신의 측근들을 요충지의 대장으로 계속해서 임명한다. 유의는 이미 형주의 군부를 장악해 북으론 한수, 서쪽으론 파촉, 남으론 영남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요충지를 점거한 상태였다. 유유가 계속 유의의 이런 청을 들어준 건 자신감의 표시이기..
동진 유유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남연. 남연 황제 모용초는 관문을 지키고 후방을 교란해 보급을 끊자는 의견보단, 대현관으로 들어오게 한 후 정병을 보내 싸우도록 명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유유의 예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저들 선비족은 탐람한 까닭에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다." 남조 유유가 남연의 수도 인근 대현관에 다다를 때까지 남연의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 유유모용초는 단휘와 하뢰로에게 5만 보병으로 임구성을 지키게 하고 곧, 자신도 병사 4만을 이끌고 임구로 간다. 유유는 병거 4천 대로 장벽을 만들어 남연의 기병을 무력화시키고 3천의 병사가 지키는 임구성을 급습해 함락시킨다. 동진의 단휘는 추격전을 펼쳐 남연의 장수 10여 명을 벤다. 다음 날에도 광고의 외성..
후연, 후진 북방 상황후연이 창건될 당시 하동에선 모용홍이 서연을 세웠으나 16국에는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했다. 고작 2년 동안 보위가 7번이나 바뀌면서 최종적으론 모용외의 동생인 모용운의 손자 모용영이 황제가 되었다. 처음엔 후연의 번국을 자청했지만 386년 장자에서 황제를 선포했다. 중흥 8년(393), 남북조시대 영웅 모용수의 공격에 장자가 함락되며 모용영은 목이 베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모용덕(전연의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자 후연 모용수의 동생)에게 기, 연, 청, 서, 형, 예주 6개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당시 북위는 이제 막 건국된 신생 국가였지만 훗날 도무제로 추존되는 탁발규의 대군은 기세가 등등했다. 북중국의 최강자인 후연을 공격해 황제 모용보를 압박했고, 이내..
처음, 동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환현(환온의 막내 아들, 환초 황제)은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황제 환현은 변범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양부는 언제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도록 말렸었어. 이제 심복인 양부를 잃었고, 색원도 잃었다고. 그러니 무모하게 이런 당돌한 일을 함에 있어 하늘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아마도 남조에서 환현을 따르는 무리에서도 환현의 동진 황위 찬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ㅠㅠ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애초 그는 환현이 환온의 아들이기에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엔 찬성했지만 마침내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자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환현도 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이제 갓 황제가 된..
이전 편 - 동진 내전 - 은중감, 환현, 오두미도 손은, 삼국지 [44화]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에서 삼국지가 벌어지는데 ... 손은은 정동장군을 자처하며 회계의 관원을 죽이고 병사들과 그 시체로 국을 끓여 함께 나눠마시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부녀자들은 아이들이 행동에 방해된다고 생각해 물속에 집어 던져 익사시키면서 이같이 주문을 외웠다. "먼저 신선이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교주를 알현한 후 너와 다시 만날 것이다." (원래 오두미도는 이렇지 않다) 당시 동진은 환현, 은중감, 양전기가 할거하고 있었으며, 조정 내부에 손은을 추종하는 신도들도 많았다. 그러나 손은의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은중감 휘하에 있던 유뢰지의 장수 ㅠㅠ 아니 ㅇㅇ 아니 유유가 이끄는 북부군에게 금세 궤멸한 것이다. 손은..
위진남북조를 가로지르는 비수대전 승리 이후, 동진은 이 기회를 틈타 양양, 익주, 양주 등지를 수복한다. 하지만, 중원 수복 의지는 약해 회수와 관중 일대의 요충지는 얼마 안 가 다시 잃는다. 전진 멸망의 원인은 비수대전 패배이다. 국력이 크게 손상된 것은 아님에도 부견의 무리한 융화 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강제적으로 살던 곳을 떠나 중원의 낯선 곳으로 이주한 이민족들의 고충을 부견은 이해했을까?황실과 가까운 저족들은 국가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으로 나간 것에 만족했을까? 부견은 꿈만 좇았지 현실적인 감각이 매우 떨어지던 인물로 보인다. "왕맹 같은 시어머니"가 곁에 없는 "뜬구름 잡기 대마왕 부견"의 패망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큰일을 치룬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효무제 사마요는..
동진의 군사는 기세를 놓칠라, 빠른 속도로 전진의 군대를 추격했다. 동진은 곧 수양을 회복하고 전진의 회남태수도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전진의 전선이 꽤 길었기에 동진의 추격전도 그다지 오래가진 못했다. 후방의 전진 군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에 비수대전은 그걸로 끝이 난다. 부견은 모용수의 부대만이 진을 유지하며 퇴각했기에 그곳으로 몸을 의지했다. 배고픔과 화살에 맞은 통증 때문에 힘들었던 부견은 회수 부근에서 한 백성에게 밥과 돼지 넓적다리를 받자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을 하사하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안락함에 싫증을 느끼셔서 스스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셨습니다. 신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그 아버지를 봉양하고서 보답을 바랍니까!" 전진군의 전선이 길었고 선봉군이..
그러나 여기 요동군의 인구가 64,158호인데 81,714명으로 잘못 계산되어 있음을 고려하여 64,158호가 약 30만이 된다고 생각하면 요동, 현도, 낙랑에 약 60만명이 살고 있었다는 계산할 수 있다. 전편 : 고구려 인구와 영토, 당나라 백제 낙랑군과 전투 그러나 창해군으로 편입되었다는 남려의 예인 28만명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다. 이것을 맥족 계통인 부여에 의한 영토 확장에 따르는 인구 흡수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부여가 뒤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니 앞의 60만에 28민을 더해 88만명이 같은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부여의 인구는 어떠하였는가? 위지 동이전(권300, 부여전)에 영토의 둘레가 2,000리라하고 인구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땅에 30,000호가..
14세(637년)에 황궁에 들어온 무측천은 입궁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황제 당태종을 가까이서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온종일 액정궁의 태감들로부터 황궁의 규칙과 예의, 용어를 배우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측천무후로선 황제의 눈에 들어 관등에 오르기 전에는 이 고단한 삶이 개선될 여지가 없었다. 무측천의 주위에는 황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늙은 궁녀들이, 어떻게 황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부지기수였다. 유력한 집안의 딸이거나 재물을 써서 힘 있는 태감이나 궁녀를 매수하지 않고서는 수많은 궁녀를 제치고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요원했다. 14세의 무측천은 일반 소녀는 구경도 하기 힘든 황궁에 후궁으로 뽑혀 들어와 장밋빛 미래에 한껏 부풀었었지만, 이내 황궁의 냉혹하고 ..
중국 전진 불안 요소부씨 일족의 저족은 봉건제의 여파로 전진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원엔 선비, 흉노, 강, 저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겉으론 부강한 국가였으나 내부적으론 결코 안정적이라 볼 수 없는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내가 대업을 이은 지 30년. 사방은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 한구석만은 아직 왕화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부견은모용수 - 관군장군, 경조윤전연 마지막 황제 모용위 - 신흥후모용위 동생 모용충 - 평양태수구지 양통 - 평원장군, 남진주자사전량 장천석 - 귀의후강족 요장 - 양무장군에 임명했었다. 비수대전 이후 중국 전진이 빠르게 해체된 이유다. 결국 부견은 왕맹의 간언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벌인 것이다. 매우 위험하고 누구나가 우려할만한 조치였다. 중..
삼국시대 부터 오나라 삼오지역은 중앙 정부완 별개의 세력이 지배하던 땅이었습니다. 바로 대대로 삼오 일대를 지배하던 지방 호족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영가의난 이후로 진원제(사마예)와 협력합니다. 아무래도 중앙정부가 팔왕의난을 기점으로 망가졌거든요. 흉노족 유요는 한나라를 세워 진나라 수도 장안에서 두 번이나 황제를 데려다가 끔살할 정도였으니깐요. 다만, 이번에 소개할 삼국지 오나라 태자태부 하소 이야기는 손권이 아직은 왕이던 시기입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닭이라고 놀리다니 ... 오나라 일대는 참 독특했습니다. 독특했어요. 하태부賀太傅(삼국지 오나라 태자태부 하소賀邵)는 오군吳郡의 태수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문밖에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군의 호족豪族들은 그를 바보라며 관..
북조 통일왕조 전진, 세상을 떠나는 왕맹 전진 건원 6년 11월의 일이었으니 병사를 일으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전연은 전진에 멸망했다. 전연을 멸망시킨 부견은 양주의 전량국 장천석에서 투항을 권했고 장천석은 번국을 칭한다. 이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양주를 함락시키고 장천석은 장안으로 끌려와 시중, 비부상서, 귀의후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비수대전에서 패배할 당시 동진에 투항하여 효무제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부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건원 11년(375), 왕맹이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유소를 올렸다. "폐하는 공업이 쉽게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응당 전전긍긍하며 여림심연如臨深淵(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삼가며, 깊은 못 가에 서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듯 하라..
세종공公은 …와 더불어 …. 몇 달 전에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하였다.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합니까" 하였다. 제帝 (진흥왕)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입니다. 단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 하였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법흥왕의 유명으로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繼父)로 맞았기에 우군(右君)으로 표현한 것으로..
진정한 지배자로서의 왕王이 등장하다, 고대국가란 무엇인가?고조선 멸망 전후 등장한 수많은 나라들도 서로 정복과 통합의 과정을 거쳤어요. 그 결과 고구려는 부여, 옥저, 동예를 흡수했고, 백제는 마한을, 사로국(훗날의 신라)은 진한을 통합해갔죠. 또 변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구야국(훗날의 금관가야,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은 변한 일대에 분포한 정치 집단의 수장으로 성장해갔어요. 한반도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으로 재편성된 거죠.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를 4국 시대가 아닌 3국 시대라고 불러요. 고구려, 백제, 신라는 '고대국가'라는 체제로 변화했지만, 가야는 연맹 왕국 단계에서 멸망했기 때문이죠. 연맹왕국의 왕이 부족장의 대표에 불과했다면, 고대국가의 왕은 타 부족장을 압도하는 지배자의 성격..
부견과 그의 참모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저족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저족 번세를 죽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중앙 정부의 군사력 확충을 위한 일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제후왕들의 작위를 공公으로 낮췄다. 그러나 백성에겐 따뜻했던 부견은 중농억상 정책으로 세금과 요역을 크게 감면하고 태학의 학생들을 격려했다. 호한분치에서 호한융합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이는 큰 반발에 부딪혀 흉노 좌우현왕과 부생의 형제인 부류, 부쌍, 부유 등이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이를 빠르게 제압하고 국외로 시야를 돌린다. 동진 환온의 북벌 당시 전연은 전진에게 땅을 떼어주는 조건으로 구원을 청했었다. 호뢰 이서의 땅, 그 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부견은 악덕 채무자에게 원금과 이자를 꼭 받아내려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秦은 부씨符씨 황제들이 다스린 나라다. 전진의 특징은 건국에서 멸망까지 지나치게 참언에 휘둘리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부견의 조부 부홍의 성은 원래 포蒲씨로 "초부응왕草付應王"이란 참언에 따라 성을 바꿨다. 포홍은 하남에서 거병했으며, 부견의 백부 부건은 황시 2년(삼진왕을 칭하던 당시의 연호, 352) 황제를 칭했다. 부홍(부견 할아버지)은 이후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세자 부건(부견 큰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원은 너희 형제들이 능힘 점거할 곳이 아니다. 관중의 형세가 좋으니 내가 죽은 뒤 서쪽으로 진격해 이를 취하도록 하라!" 환온의 2차 북벌 이후 부건은 몰래 관중 일대를 공격해 동진의 장수 두홍과 장선을 격파하고 장안을 도성으로 삼았다. 이미 독립 상태나 ..
유선은 207년에 태어나 271년에 65세의 나이로 저 세상을 가셨습니다. 촉한의 후주로 자는 공사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아두입니다. 유비의 아들로 어머니는 소열황후 감씨이며 삼국시대 촉한의 제2대 황제입니다. 후주 유선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며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촉한을 건립할 때 태자가 됩니다. 223년에 즉위하여 42년간 삼국지 속 황제로 살았습니다. 제갈량은 상부라 불렀고 강유의 북벌 당시엔 간신해 황호를 총애했습니다. 263년, 위나라 장군 등애가 양평, 면죽에 이르러 제갈첨 부자를 전쟁 중 사살하자 유선은 항복하여 촉한은 멸망합니다. 유선은 낙양으로 끌려가 안락공에 임명되어 후에 낙양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 삼국지 유선 어린 시절208년 (건안 13년) 9월, 조조..
간문제는 온후한 성격으로 당당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봐선, 이 당시 환온이 과연 적극적으로 찬위를 노렸을진 알 수 없다. 반면 이에 반대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이 사례를 놓고 보면 환온이 간문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환온은 간문제, 태제 사마희와 함께 수레에 타고 가다가, 은밀히 사람에게 명하여 수레 앞뒤에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게 하였다. 행렬은 깜짝 놀라 혼란에 빠졌다. 태재는 두려움에 떨며 수레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뒤돌아서 간문제를 보니 조용히 있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환온이 말했다. "조정 안에도 이런 현인은 있는 법이로군." 그러나 간문제 또한 즉위하자마자 병에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환온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
이전에,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모용수에게 영격을 맡기는 한편, 전진 부견에 호뢰 이서의 땅을 베어주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대다수 중신이 반대하는 와중에 왕맹만은 원군 파병을 부견에게 강력히 주장한다. "전연(연나라)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환온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 환온이 패주한 후 전연(연나라)의 원기가 크게 상해 있을 때 기회를 틈타 연나라를 도모할 만합니다." 전진 황제 부견은 이를 받아들여 2만 병사로 전연과 모용수의 군대를 돕는다. 당시 환온은 우물쭈물하며 사태를 관망했는데 그는 북벌을 나왔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계속 동진 조정의 내부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위를 찬탈할 생각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령관이 이러니 동진의 북벌군이 제대로 ..
한편, 평양까지 도주한 요양은 관중을 얻기 위해 부견과 싸우나 이내 패하고 포로가 된 뒤 살해된다. 요양의 동생 요장이 남은 병력을 추스른 뒤 부견에게 항복하니, 당시로선 "그 날,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예상이나 했을까. (위진남북조 시대에 큰 사건) (출처 : 위진남북조, 오호(五胡)의 쟁패 20 - Exodus) 목제 승평 5년(361), 5월 환온은 동생 환활에게 허창을 치게 하여 전연의 대장 모용진을 몰아내고 함락시킨다. 6월에 목제 사마담이 병사했으나 후사가 없어 성제 사마연의 장자 낭야왕 사마비가 보위를 이으니 그가 애제이다. 애제 흥년 원년(363), 전연의 군사가 낙양을 공격하자 환온은 구원병을 보내는 한편 낙양 천도를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린다. 중원의 옛 영토 회복과 강남의 재산을 포기..
환온은 파촉의 성한 평정의 공으로 정서대장군, 개부, 임하군공에 봉해졌다. 촉을 평정하자 환온의 위명이 천하를 진동시켰고 조정을 장악하던 회계왕 사마욱은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양주자사 은호를 심복으로 삼아 조정 대사에 참여시킨다. 이런 조치로 동진 조정은 환온의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리게 된다. 이런 일은 이후 벌어질 환온과 은호의 북벌, 양쪽 모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은호의 강족 불신은 동진 북벌 군대에 악영향을 미친다. 동진 목제 영화 5년(349), 동진으로선 북벌하기 좋은 시기였다. 후조의 석호가 병사하며 석씨 종친 간 내분이 일어나자, 환온이 북벌의 상주문을 올렸다. 그러나 사마욱을 위시한 동진 조정은 환온이 더 많은 공을 세우는 게 탐탁지 않았다. 환온 대신 저태후의 부친인 저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