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영태후 시기. 당시, 조정 내부에선 변란이 일어나 청렴하며 재능도 있고 문학도 뛰어났던 청하왕 원역이 매관매직을 일삼던 영태후, 유등, 원예를 비난했다. 유등은 크게 두려워하며 원역을 모함한 뒤 살해했다. 너무 어렸던 효명제 원후는 유등의 거짓말에 속아 충신 원역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었다. 이어 유등은 영태후의 동생 남편인 원예와 조서를 꾸며 영태후를 연금시켰다. "호랑이(유등)를 키우다 물린다고 하더니 바로 내(영태후)가 그 꼴이 되었구나!" 원예, 원예 부친 경조왕, 유등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변방 6진의 군사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사사로이 남조와 교역해 부도 쌓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제국은 이렇게 서서히 몰락한다. 이때 국인國人의 처우도 빼앗기고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6진의 군민들..
풍태후 사후 진정한 황제가 되어 한화 정책을 추진했던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원굉의 치세가 저문다. 북위 효문제 태화 21년(497),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제나라로 진격했으나 남제 남양 태수 방백옥의 복병계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듬해엔 제명제 소란이 죽자 국상이 있는 나라는 치지 않는다며 이내 철군했다. 499년, 효문제가 사망하고 황태자 원각이 즉위하니 이가 북위 선무제다. 선무제는 황숙 원희가 모반하자 원씨 종친을 불신하고 외숙인 고조를 신임했다. 그 배경엔 자귀모사의 원칙을 어기고 살아남은 그의 생모 영태후(호씨라서 호태후라고도 함)가 있었다. 자귀모사를 어긴 이 시기부터 북위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는다. 고조가 붕당을 결성해 북해왕 원상, 청하왕 원역을 사사로이 죽이고 권위를 높이기..
"작은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큰 현으로 승진시키고 큰 현의 현령이 유능하면 이천석 관리로 승진시키라." 이런 양무제의 조명 덕택에 산음현령 구중부가 장사 내사, 무강 현령 하원이 선성태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송과 남제에서 시행하던 오관五館을 일반 수재에게도 개방하고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관 출신 중 유능한 자들을 뽑아 바로 관리로 임명했다. 이 시책은 수나라 시기 과거제를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양나라 중기까지는 남조의 문학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활발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관원이 되기 위한 교양 습득을 위해 학관을 세웠다. 오경 박사가 한 명씩 임명되어, 수백 명이 소속된 한 관을 담당했으며, 이 관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우수한 학생을 관료로 발탁하였다. 기존의 구..
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498년 12월, 암군 동혼후 소보권이 남제의 보위를 잇는다. 제명제 소란은 죽기 전에 서효사를 상서령, 심문계를 좌복야, 강우를 우복야, 유훤을 위위, 진현달에겐 군정, 시안왕 소요광에겐 안팎의 정사를 맡겼지만 동혼후의 전횡을 막을 순 없었다. 소보권은 즉위하자마자 부황의 영구가 태극전에 안치된 모습이 눈에 거슬려 속히 매장케 했다. 곡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목이 아프다는 이유로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싫어했고 태감들과 함께 굴을 파 쥐를 잡는 쥐잡기 놀이를 밤새도록 했다. 말을 더듬는 버릇도 있어서 신료들과 정사를 논하는 것도 꺼려, 태감과 무뢰배 소년들과 어울리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옹주자사로 있던 종친 소연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해 군비를 강화하고 사람을 ..
북위 효문제 모순 - 한화정책 효문제 태화 19년(495)엔 제나라 공격을 감행했으나 무덥고 습한 날씨에 군수품 조달이 늦어지면 소득 없이 귀환한다. 이해 7월, 북위는 5호 16국 국가들이 행해오던 호한분치를 버리고 한화漢化를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물물교환 방식을 버리고 태화오수전을 주조해 화폐 개혁을 시도했고, 낙양에 국자감, 태학, 사문소학을 두었다. "오늘 짐(효문제 탁발굉)은 선비어를 포함한 모든 북방어를 금지하고 한어로 통일해 쓰기로 했다. 30세 이상의 관원은 이미 오랜 습관이 된 까닭에 서서히 바꾸는 것을 윤허하나 조정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30세 이하의 관원은 선비어로 말하는 것을 금한다. 이를 어길 경우 곧바로 강등과 면직 조처를 취할 것이다." 북위 태화 20년(496), 탁발씨를 원씨..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
탁발도가 남정에 나섰을 때 태자 탁발황이 감국으로 있었는데 휘하의 도성이 탁발도가 총애하는 태감인 종애와 반목했다. 종애는 탁발도가 돌아오자 도성 일당의 죄를 날조해 보고했고 탁발도는 이에 도성 일당을 죽인다. 탁발황은 이에 병을 얻어 곧 사망하고 종애는 탁발도가 추궁할까 두려운 나머지 늦은 밤, 영안궁에서 자고 있던 탁발도를 죽였다. 황망한 5호16국 시대 영웅의 죽음이다. 다음 날, 황태자에 이어 황제가 죽자 황제의 손자 탁발준이 보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상서좌복야 난연, 시중 화정, 시중 설제는 탁발도의 3남인 북위 진왕 탁발한을 옹립고자 했다. 그러나 종애가 미리 눈치채고 무장한 태감들로 이 세 사람을 죽인 뒤 탁발한 마저도 살해한다. 그리고 조서를 조작해 오왕 탁발여를 보위에 올..
북연이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기, 탁발도는 북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10여 개 큰 군을 먼저 손에 얻는다. 풍홍은 송나라에 칭신했으나 송나라도 별수가 없었다. 북위 연화 2년(433), 풍홍은 용성 아래에 북위군이 진을 치자 몰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북위군은 용성을 불태운다. 풍홍은 이후에 송나라로 도망치려 하거나 황제 노릇을 하려 했기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일족과 함께 주살 당한다(437년). 이전에 동생 탁발고를 인질로 잡아 두었다가 살해한 정동과 부고패의 5족도 도살했다. 이후 등장할 유명한 북위의 풍태후는 풍홍의 손녀이기도 하다. 탁발도의 북방 통일을 위해 남은 건 북량 정벌뿐이다. 북량은 옛 전진의 신하 여광이 세운 후량의 후신으로 여광의 부하 저거몽손은 여광을 배신하고 단업을 양왕凉으..
서거일은 1910년 3월 26일, 사형선고일 2월 14일, 거사일 10월 26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내용 출처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며, 1. 안중근 의사에 대해 2. 이토 히로부미 3. 안중근 의사 서거일 순서로 소개합니다. 천천히 정독해 주세요.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 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소소업은 남제 경성(수도)으로 돌아와 아픈 아버지를 위해 곡성을 내는 등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서 황제가 되었다. 소색은 이 연극에 속아 문혜태자의 뒤를 이어 소소업을 제나라 황태손으로 삼아 제위를 물려준다. 방탕한 소소업은 국고를 함부로 썼고 황후 하씨도 난교를 즐기자 종실 소심과 소탄지는 은밀히 서창후 소란과 모의해 폐립을 준비했다. 애초 소색(소도성 아들)은 소소업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5년 동안은 모든 것을 재상에게 맡기고 너는 의견을 섞지 말 것이며, 5년이 지나서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라. 만약 스스로 이룬 것이 없더라도 아주 한스러워하지 마라 ... 만약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당연히 잘 해나가겠지!" 이전에 소소업이 황제가 되기 직전, 소색의 장례 중에도 소소업은 기녀들은 불러 ..
건원 4년(482) 3월, 위진남북조 시대 제나라. 무제(남제 무제 소색, 소도성 장남)는 유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지방관의 수탈을 막기 위해 보내던 검관(요즘으로 치면 감찰관)들이 지방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수수하는 행태가 많아 검관을 폐지했다. 조세를 포함해 건강으로 보내지는 많은 물자의 징수 방법과 수량도 법으로 정했으며, 조세 제도를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남제 중앙 정부의 재정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고, 조정 신하들의 찬사를 듣던 망나니 황태자 손자가 있었다. 소색과 소장무(소색 아들 문혜태자, 소소업 친부)의 편애를 받던 소소업이다. 제나라 소색은 즉위하자, 소소업을 남군왕에 임명하여 식읍 2천호 받도록 한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호..
전폐제 유자업이 폐위되고 보위에 오른 명제 유욱(유의륭의 11남)은 472년에 사망하고 장남 후폐제 유욱昱이 즉위한다. 유욱은 고명대신으로 원찬, 저연, 채흥종 등을 지정했는데 남제를 세운 소도성은 저연이 발탁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송 원희 2년(474), 계양왕 유휴범은 종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불만을 품고 심양에서 거병하나 우위장군 소도성에게 제압당한다. 소도성은 이때의 공으로 상서좌복야에 임명됐다. 이듬해엔 건평왕 유경소가 제위를 탐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후폐제 유욱은 유송 황제로 즉위 당시 12세에 불과했다. 남조의 황제답게 즉위 한 그 날부터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후폐제 유욱위진 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유욱은 스스로를 이장군李이라 칭하며 궐 밖에서 망나니처럼 굴었다...
효무제는 조세를 포탈하는 관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 시기 유송은 재정이 악화되어 갔다. 또한 문벌귀족은 노력하지 않아도 고관에 오르나 한문, 서민들은 출세길이 막혀 서진 말기처럼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행태가 악화하었다. 따라서 관료들의 업무는 항상 지체되었고 국가 운영은 말단 관리들이 담당하게 되어 유송은 내부가 흔들리게 된다. 국가의 내부 문제를 악화시킨 효무제 유준은 35세의 나이에 병사하고 태자 유자업이 465년 정월에 뒤를 이으니 그가 전폐제이다. 그 유명한 유.자.업. 유송 전폐제 유자업은 어려서부터 조급하고 포악했는데, 하루는 어머니 왕태후가 병이 위독해지자 아들인 황제가 보고 싶다며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유자업은 이렇게 말했다. "병자의 방에는 귀신이 많은데 어찌 갈 수 있는가!..
북위 vs 송나라원가 27년(450), 양양, 수양, 팽성 등에 황자들을 부임시키며 북벌의 의지를 굳건히 세워 두었었던 문제가 왕현모를 필두로 두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이때, 유송 문제는 여러 문인 귀족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글자도 못 읽고, 책에는 손도 댄 적이 없던 골수 무인 심경지가 문제에게 직언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컨대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밭일은 머슴에게 맡기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시키는 법. 폐하는 지금 적국을 치려고 하면서 백면서생들과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유송 문제는 웃으며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대대적인 송나라 공격과 시기가 겹쳐 북벌군은 되려 수세에 몰린다. 공격에 나선 병사가 수비를 맡은 것이다. ..
원가 6년(429), 팽성왕 유의강을 형주자사, 장사왕 의흔을 남연주 자사, 강하왕 유의공을 남서주자사로 삼으며 황권 강화를 도모한다. 원가 7년(430), 문제 유의륭은 재위 기간 국력이 강성해지고 북위에 빼앗긴 황하 이남을 수복해야 한다는 의론에 따라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총 두 차례 북벌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 원가 8년(431), 북벌군은 사실상 영토 확장의 의지가 없었다. 유송 문제 본인이 권신들을 지나치게 의식해 북벌에 나선 장군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으며, 황하 이남의 땅들은 공격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우므로 이때의 북벌은 사실상 군사 시위에 불과했다. 총주자사 유흥조가 하북으로 진격해 태항산 일대를 장악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유는 363년 봄, 위진남북조 시대,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으로, 일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생활에 쪼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고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아이를 죽이려고도 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 주었기에 유유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건 전장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처럼 정말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황제(송무제)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상상이나 했으랴. 유송 무제 유유, 위진남북조 시대 2번째 남조 국가 송나라 건국유유가 420년 6월에 보위에 오르니 그가 송나라 무제다. 유유는 재위 후 중앙재정 확립과 황제권력의..
태무제 유연 공격태무제 탁발도는 대하를 멸망시킨 뒤 유연을 공격하려 했으나 대다수가 반대하고 최호만이 찬성했다. "저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여름의 허를 틈타 정벌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더 큰 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남적(송나라)은 고려할 필요가 없소. 전에 유연을 칠 때 남적은 말로만 우리를 친다고 했을 뿐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소." 태무제 탁발도와 다른 대신들에게 이런 말을 하자 태무제 탁발도는 최호의 의견을 좇는다.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은 북위의 골칫거리여서 공격에 나선다. 신가 2년(429) 여름, 유연은 사방으로 흩어져 방목하고 있던 까닭에 각개격파 당한다. 북위군은 동서 5천 리, 남북 3천 리에 걸친 추격전을 펼쳐 포획한 사람과 노획한 말과 소 등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
태무제 탁발도 즉위태상 8년(423), 탁발사가 병사하니 아들 탁발도가 보위를 잇는다. 북위를 화북의 지배자로 만든 태무제가 바로 그다. 명원제의 사망 사실이 알려지자 유연은 북위를 공격해 대국의 옛 수도 성락을 함락시킨다. 탁발도는 친히 경기를 이끌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가 운중에 이르렀다. 유연의 국왕 흘승개가 북위군을 포위했으나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어린 황제를 보고 용기를 얻은 북위군은 유연의 대장 어척근을 활로 쏘아 죽이며 포위를 풀었다. 시광 2년(425) 11월, 탁발도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유연을 격파했고, 이듬해인 시광 3년(426)엔 관중의 대하를 멸망시킨다. 대하 수도 통만성위진남북조 시대 413년, 혁련발발은 대하를 세우고 유유가 동진으로 돌아간 틈을 노려 관중을 손에 넣었..
개혁 군주 탁발규 말년천사 원년(404), 모든 부락의 자제에게 대대적으로 작위를 내렸는데 왕이 10명, 공이 22명, 후는 79명, 자는 103명에 달했으니 이는 선비족(탁발선비)의 나라 북위 말기에 중앙 정부의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명나라 말기처럼 국가 재정으로 놀고먹는 자들을 챙기기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 영웅인 탁발규는 말년에 한식산을 복용해 건강이 나빠졌고 정신병까지 생겼다. 밤새도록 홀로 중얼거리고 군신들과 회의를 할 때는 기분이 쉽게 변하여 신하들이 이전에 행한 악행이나 원한 관계를 끄집어내 살해했다. 이외에도 신하들을 기분에 따라 죽인 뒤 시체를 천안전 앞에 내버려 두니 인심이 술렁였다. 탁발규는 이전에 작은 이모(하란비)에게 반해 첩으로 들이려 ..
북위 vs 후연탁발선비 탁발규는 처음에 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동생 탁발고를 보내 공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후연 내부에서 화친을 반대하고 선비족 탁발고를 인질로 잡자 후연을 선제공격하고 이를 판도에 넣었다. 이에 위진남북조 시대 강자였던 후연은 태자 모용보, 모용농, 모용린 등으로 반격을 개시했으나 패배한다. 그렇지만 영특했던 모용수도 말년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으니 북위에겐 기회였다. 태자 모용보에게 명해 북위를 공벌케 했다. 성공하면 자연스레 보위를 이을 수 있었다는 계산을 했지만, 착오였다. 동진 효무제 태원 20년(395) 8월, 탁발규는 변경의 병사를 뒤로 물러나게 한 뒤 기습할 생각이었다. 대장 장연의 계책이었다. "연나라 군사는 최근 적교를 활대에서 격파하고, 장자에서 모용영(서연)을 멸..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에 접어들며 또다른 선비족 탁발선비가 등장한다. 탁발선비 대국 代國위진남북조 시대, 탁발부의 정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 탁발의려 형제 때부터이다.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많은 한인이 참합에 근거지를 두었던 두 선비족 형제의 세력권 안으로 피난하였고 탁발의이 또한 병주자사 사마등에 호응하여 유연, 석륵과 대적했다. 이에 진 회제는 310년 대국공에 봉하니 이것이 대국代國의 시작에 해당한다. 탁발의려는 평성을 남도, 성락을 북도로 하였는데 이중 북도를 직접 다스리고 평성을 포함한 남부는 아들들에게 맡긴다. 이후 탁발의려의 장남 탁발육수는 아버지를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탁발부는 이를 계기로 남부와 북부의 대치로 이어진다. 이를 하나로 합친 건 탁발의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