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요약 - 어린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는 동진. 군공을 세우는 환온 유익은 야심이 많던 사람이었다. 형주의 관청에서 대회가 열린 자리에서 막료들과 나눈 대화는 이렇다. "나는 한나라 고조라든가 위나라 무제(조조)가 되고자 하는데 어떠하오?" "(장사 강반이 말하길) 공께서는 제 환공이나 진 문공과 같은 사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고조나 위무제와 같은 분이 되시는 것은 원하지 아니합니다." 함강 8년(342), 성제 사마연이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유량의 동생이자 외숙인 유빙이 성제의 친동생인 사마악, 강제를 즉위시킨다. 유량 사후, 손작孫綽이 그를 위해 비문을 지었다. "유공은 원래부터 기꺼이 세속 밖에다 마음을 두고 있었다. 유연한 태도로 세상을 살면서 몸을 도회韜晦(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숨..
이렇게 좋은 책을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서해문고 관계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서평 시작합니다. 수많은 민란충무공과 우암의 후손들마저도 탐욕에 빠진 구한 말. 작디작은 권력을 탐하려는 자들은 수많은 이들을 박해하고 괴롭혔다. 책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눠보면, 조선 왕조에 대한 분노의 민란과 식민지배를 시작한 일제의 분노에 대한 민란이 존재한다. 친일파에 대한 민란은 의외로 적다. 그들의 영향력을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원인인 듯 민씨 일가가 다시 집권하자 민중들이 대원군을 그리워했으나, 민씨 일가의 흉포함이 그 이유이지 대원군의 선행이 딱히 그리웠던 건 아니라는 기록처럼, 구한말의 민중들은 상하좌우가 모두 막혀 들끓는 분노를 표출할..
환온의 측근인 치초 일가 중 일부가 오두미도 도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훗날 손은의 난이 발생했을 때, 성문을 열고 손은을 받아들인 사씨 일가도 있었다. 이를 보면, 도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파촉과 동진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다. 관련 일화를 하나 살펴보면, 동진 치초 일가 중 한 사람인 치음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었는데, 배탈이 오래 지속되자 우법개란 유명 의원을 찾아간다. "군후께서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정진精進을 너무 지나치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탕약 한 제를 받아 마셨더니 곧바로 설사가 나왔고, 주먹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몇 개 나왔는데, 이전에 삼켰던 도교 부적들이었다. 또, 지위가 높았던 왕헌지는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훗날 사중랑 사만은..
조약의난 종결, 동진 군벌 해체, 위진남북조 성한 [32화] 10월 중엔 왕도가 변심한 소준의 심복 노영의 안내로 유량이 주둔하고 있는 백석으로 달아나는 등 전황은 소준에게 불리해지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소준의 병사들은 동진의 군대에 계속 승리를 거뒀다. 당시 온교는 군량이 떨어져 도간에게 빌리기도 하는 등 전황은 되려 포위한 쪽이 수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준은 계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건강 주변의 포위군 영채를 공격했다. 온교와 도간 등은 보병전에 익숙지 않으니 석두성을 치는 것이 좋겠다 판단하여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 진을 펼쳤으나 소준의 아들 소석과 용장 광효의 수십 기에 대패했다. 수십 기가 1만여 명의 보병을 낮은 곳에서 위로 향하며 격파한 것이다. 큰..
동진 군벌 소준의난, 명제 사마연과 외할아버지 유량 [31화] 유량은 회수 일대가 공략당하자 왕도를 대사마로 임명해 이를 막도록 하는 한편, 후조의 군대와 맞서며 전장에 있던 소준의 병권을 빼앗으려 시도한다. "소준은 승냥이의 야심을 지니고 있어 끝내 반란을 일으킬 것이오. (역모를 부추기는 발언)" 광록대부 변호가 반대했다. "소준은 강병을 이끌고 하루 만에 경성에 이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주둔하고 있소. 만일 변이 일어나면 화난이 가볍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유량은 이런 말을 가볍게 skip하고 밀어붙인다. 명예직에 임명해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군권을 소준의 동생 소일에게 넘기려 했다. 유량에게 압박을 받던 소준은 휘하의 사마를 유량에게 보낸다. "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중임을 맡고 있으..
중국 이화원颐和园, 삼국지연의 그림, 채양, 삼고초려, 유비 백마 ■ 고성에서 관공(관우)이 채양蔡阳의 목을 베다 관우는 감부인甘, 미부인糜, 두 형수를 호송하며, 고성古城으로 도주한다.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장비와 맞서 싸운다. 조조의 장수 채양이 추격해 오자, 성루에 있던 장비는 북을 치며 응원한다. 관우는 이에 호응하듯 채양과 겨뤄 그의 목을 벤다. ■ 유황숙劉皇叔의 말이 물속에서 뛰어오르다 유비는 형주에서 유표를 보좌했으나, 그의 아내 채부인은 유비를 없애려 했다. 채모의 병사가 추격해 왔지만, 유비의 말은 물속에서 뛰어올라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 유비는 한나라 황실과 똑같은 유劉가 성입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헌제獻帝 유협劉協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그를 황제의 숙부인 유황숙이라 부르기도 했..
어린 황제 성제 사마연 및 반역자 왕돈, 할아버지 유량 [30화] 반역자 왕돈은 태녕 2년(324) 8월, 온교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5만 명의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재차 건강으로 진군한다.명제 사마소는 대범하게도 말을 타고 고숙까지 이동해 반역자 왕돈의 병력 상황 등을 살피는 등 문무를 겸비한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한번은 몰래 군대의 형세를 정찰하려고 고숙까지 이르렀는데 반역자 왕돈 군영의 병사가 이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왕돈은 누워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틀림없이 누런 수염의 선비족 놈이 온 것이다." 동진 황제 사마소의 친모가 연나라 사람이라 그렇게 말은 했으나 추격하여 잡아내진 못했다. 이후 반역자 왕돈은 왕함에게 월성으로 향하도록 명했으나..
사마소 - 황제의 반란, 권력 찬탈자 왕돈을 내쫓는 동진 [29화] 훗날(왕돈이 사마소 황제에게 패망하던 날), 왕함(왕함의 아들이 왕돈의 장남으로 입양)은 왕빈과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해 왕빈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빈은 이런 일화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려 했었다. 같은 해 말, 반란에 성공했던 왕돈은 대군을 이끌고 무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원격으로 조정을 제어한다. 비록 동진 조정은 제압했지만, 지방 군벌은 확실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약은 왕돈이 조정을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왕돈의 사자에게 거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아흑阿黑(왕돈의 어렸을 때 자字)에게 말하라. 어디서 감히 불손한 짓을!서둘러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가라!즉시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3..
동진 왕돈 반란 성공, 허수아비 황제 사마예 [28화] 진원제 대흥 4년(321), 사마승을 상주자사로 삼았다. 대연에겐 사주, 연주, 예주, 병주, 옹주, 기주 6개 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고,유외는 진북장군 겸 청주, 서주, 유주, 평주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동진 원제는 후조의 석륵을 서와 북에서 막는다는 취지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으론 왕돈 반란을 미리 방비하려 한 것이다. 진원제 영창 원년(326), 왕돈이 마침내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목으로 건강을 향해 진군한다. 왕돈은 상주자사 사마승을 설복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슷한 시기 사마예는 유외와 대연에게 건강을 지킬 것을 명한다. 당시 건강의 대신들은 왕돈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주의 등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조정의 대책..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 사마예 동진 건국 [27화] 이 직전에 『진민제는 한나라(흉노 유연이 세운 국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장안 함락 전 사마예에게 이런 친서를 보낸다. "짐은 지금 궁지에 몰려 성에 유폐돼 온갖 걱정이 든다. 만일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날이면 승상이 가히 만기를 통섭해 낙양을 되찾고 종묘를 수복함으로써 이 치욕을 설욕하기 바란다." 사마예는 사마업이 포로로 잡히자 보위에 오르진 않았지만 진민제 건흥 6년(317)에 진민제가 피살되자 유곤, 단필제, 단진, 소속 등의 상표로 보위에 올랐다. 사마예가 동진의 창업주 진원제元帝이다. 동진 건국 이전에 이미 왕씨들이 강남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상태였다. 왕돈은 호북, 호남을 비롯한 양자강 중류, 왕도는 양자강 하류를 ..
역알못 주장하는 김부식 삼국사기 비판, 삼국시대 이해 못한 사람 본인이 역알못이라는 거 모르고 삼국시대를 주제로 쓰여진 김부식 삼국사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화가나서 한 번도 더 읽어봤는데, 역알못 맞아요. 더군다나 이런 사람이 국정 교과서 논의에 끼어들까 봐 그것도 걱정입니다. 제가 링크 건 글로 이동해 댓글 좀 보세요. 아주 속이 터집니다. 역알못에 호응하는 건 삼국시대 이해 못하는 역알못 뿐이겠죠. (흔한 역알못의 김부식 삼국사기 까는 글. 삼국시대 이해도 못하는 사람의 글 [클릭]) 관련 글신라 말기 822~839년 주요 인물, 김양 김헌창 장보고 문성왕 등고구려 전성기 광개토왕의 일생과 업적,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서평고구려 벽화로 보는 우리민족의 아름다움 [미술품]◆ 본문 중 삼국사기는 우리..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염위 멸망, 선비족 모용준 연나라 건국, 강남의 사마예 [25화] 당초 유현 또한 독립할 의지가 있었던 인물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현은 곧 업성과 양국의 거리가 먼 것을 이용해 왕을 칭한 뒤 염민의 영토 중 하나인 상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유현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염민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상산의 구원에 나서자 유현의 군대는 도망치기 바빴고 양국을 지키지도 못했다. 결국 『유현과 공경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양국 또한 초토화되었다. 염위 영흥 3년(352) 4월, 시기를 조율하던 모용준이 마침내 움직인다. 동생 모용각과 모용패에게 대군을 주어 염위를 비롯한 후조와 인근 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염민은 잇따른 승리에 도취해 친히 영격에 나섰으나 모용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염민의..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석민 등의 한족은 호인들은 이들이 나가봐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 되리라 판단하고 살호령을 내린다. 한족 장병들이 호인들을 도륙해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업성 인근 지에서의 도륙까지 합치면 그 수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또한 이전에 기주 일대로 강제로 이주당한 수백만의 호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서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으며 굶주림과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열에 두셋에 지나지 않았으며 들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살호령에 격분해 여음왕 석곤이 태위 장거 등과 업성을 공격했으나 무예가 뛰어난 석민과 이농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되려 대장 장하도 등을 잃..
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태녕 원년(349) 5월, 석호의 아들이자 정실 소생으론 둘째인 석준이 황위에 올랐다. 석준은 곧 석씨 일가를 요직에 배치하며 제후왕들을 위로한다. 유황후와 장시에게 살해당한 석빈의 아들 석연을 황태자로 삼고 석감을 시중, 석충을 태보, 석포를 대사마, 석곤을 대장군,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했으며 자신이 보위에 오르도록 공을 세운 이농도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시켰다. 당시 석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종실 제후왕들 또한 많았다. 계성의 패왕 석충은 5만의 정병으로 업성으로 진군했는데 업성에 다다르자 군세는 10만에 육박했다. 석준은 석충에게 친서를 보내며 형제의 우애를 역설하며 중병을 거느리는 것을 승인한다 했다. 석충은 형제의 의를 생..
고구려 인구와 영토, 당나라 백제 낙랑군과 전투 고구려 인구1. 당나라, 백제 공격과 연정토 투항 (영토 크기) 출처 :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 이옥, 1984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둘레는 2,000리이며 이 안에 30,000호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구당서 권 199 상, 고구려에는 7세기 중엽 고구려에 697,000호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왕국이 7세기 동안 영토를 상당히 확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영토는 5세기 말경에는 북으로 농안, 남으로는 충청도, 서로는 요하, 동으로는 동해까지 뻗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총인구수가 구당서에 전해지는 만큼 많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한 호가 보통 4인에서 5인 정도로 구성된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후조 왕자의 난, 석수 석도 석세 석준, 흉노 유씨 후예 [22화] 후조 건무 14년(348) 9월, 하루는 석호가 석선이 마음에 안 들어 석도를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는 말을 했다. 이에 석도는 기뻐한 나머지 자신의 태위부에 선광전을 지으며 자축했다. 석선은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선광전을 둘러보던 중 선광전의 宣이 눈에 띄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이에 선광전을 지은 장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선광전 마저 불살랐다. 얼마 후, 몰래 양배, 모성, 조생 등을 보내 동생 석도를 죽였다. 이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석선이 황제가 되면 석도의 봉지를 넘겨주겠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석호도 석선과 석도의 반목을 모르진 않았다. 석호는 이를 그냥 넘기려 했는지 눈에 띄는 후계자가 있으면..
코케 테무르 내분과 원나라 멸망, 주원장 장사성 진우량 홍건적 대립 ■ 원나라의 자멸, 원나라 멸망 장사성의 반란은 원나라에 있어서는 중대한 사태였다. 어찌 되었든 염과 수입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회염과 강남 물자를 경기로 수송하는 대동맥인 대운하의 사명이 제압되고서는 한시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원나라 멸망에 가까운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지정 14년, 원나라는 승상 투쿠타를 긴급 출동시켜서 토벌에 임하게 해서 서전에서 반란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렇지만 국가 위급의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중앙에서의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은 원나라에서는 투쿠타 승상의 조정 부재를 틈타 반대파의 화책이 주효해서 토벌 중임에도 불구하고 투쿠타는 일체의 관직을 빼앗기고 운남에 유적된다. 이것은 장사성에게는 바로 예상 밖의 행운..
후조 대조천왕 석호의 태자 문제, 고구려 공격, 장안 증축 [21화] 후조 건무 3년(337), 안정의 후자광이 스스로 불태자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석광에게 제압당한다. 후자광은 대진국(로마)에서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불교를 빙자하여 반란을 획책한 것은 특이하다 할 수 있겠다. 석호는 불교를 신봉하여 구자국 출신의 불도징을 크게 대우했는데 사공 이농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게 했고 조회가 열리는 날에는 태자와 여러 공작이 불도징을 부축하여 전각에 오르게 하는 등 후조 전역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문화를 스스로 만들었다. 불도징은 이후 석호가 황태자 석수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석호는 대조천왕을 칭하며 석수를 황태자로 삼았다. 석수는 황태자에 책봉된 뒤 여인을 납치, 강..
열하일기 - 흑칠 젓가락, 당나라 문학가 왕유 에피소드 연암께선 청나라 열하로 이동하는 중 이곳저곳에 들리며, 출처가 불분명한 책에서부터 조선에 알려진 귀한 책을 많이 접하셨습니다. 열하일기를 풍족하게 만드는 많은 이야기는 흥미로운 책이라면 놓지 않고 정독하셨던 연암의 독서량과 비례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아래 몇 가지 신기한 이야기는 열하일기의 동란섭필銅蘭涉筆 편에 나온 것으로, 연암께선 다른 책의 기록을 인용하고 그 뒤에 본인의 의견을 적는 것으로 열하일기 신기한 에피소드를 정리하셨습니다. 열하일기 신기한 에피소드 1. 흑칠 젓가락유양잡조酉陽雜爼 단성식段成式 저著에 보면, 요사이 어떤 바다 사람이 신라로 가는 길에 바람에 밀려서 한 섬 위에 이르니, 산에 가득하게 흑칠黑漆 젓가락이 달린 큰 나무가 많았다..
후조 황제가 된 폭군 석호, 갈족 석씨 일가의 분열 [20화] 석륵이 마침내 유언을 남겼다. "...(중략) 중산왕 석호는 재삼 옛날 주나라 건국 공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공을 생각도록 하고 이를 구실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석호는 석륵의 아들, 또는 조카로 기록되어 있는데 295년생 토끼띠의 석호는 274년생 말띠인 석륵과 21세 차이가 나기에 아들, 조카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석륵이 태자를 314년생 개띠 석홍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아들은 조카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서진 말기, 오랑캐들이 노비처럼 매매가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석호도 어려서부터 호족 노비로 하북과 회하 일대를 전전했다. 어렸을 때 『개와 돼지』의 음식을 ..
경기도 양평은 사나사, 상원사, 운계서원, 화서 이항로 생가, 한음 이덕형 선생묘 및 신도비 등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저같은 역덕후에겐 참 좋은 여행지죠. 근데, 역덕후도 마냥 유적지만 보고 놀러 가긴 부담스러운 곳이긴 합니다. 양평이란 곳이 서울에서 가깝다고는 하는데, 여기를 당일치기나, 1박 2일로 가려면 당연히 숙박 시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찾다 보니 양평 미리내 힐빙클럽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오늘은 역덕질하려다 양평 미리내 힐빙클럽 찾아본 후기 남기려고 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에 있는데 양평 다녀오니 안 가본 곳이 많아 기록할 겸 포스트를 따로 남기게 되었네요. ◆ 미리내 힐빙클럽 이용 안내 및 요금먼저 미리내 힐빙클럽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사이트 : 바로가기 [healbeing..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