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동위) vs 우문태(서위) 2차 회전 사원지전 [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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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 천평 4년(537), 동위 서위간에 사원지전이 폭발한다. (2차 회전 이 글을 주로 참고해 작성)

8월, 우문태는 이필, 독고신, 양어, 조귀, 우근, 약간혜, 이봉, 유량, 왕덕, 후막진숭, 이원과 달해무등 12명의 장수를 이끌고 동위로 진격한다.



병력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우문태는 병사들 앞에서 맹세하며 말한다.

"이번 출병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폭란한 자를 주살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여러 병사에게 달려 있다. 무기와 전마를 잘 정돈하여, 혈전에 대비하라. 재물을 탐하거나 적을 경시하거나, 흉포하게 행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죽일 것이다!"

바로 우근을 동정선봉으로 삼아, 그날로 반두(盤豆, 지금의 허남성 양평의 서북)을 공략하고, 동위의 수비장수 고숙례(高叔禮)를 생포한다.


다음 날, 다시 항농성(恒農城,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을 함락 시켜 동위의 섬주자사 이휘백, 항농 수비 장수 고천 및 수비 군사 80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리하여 일시에 위세를 떨치며 주위의 의양(宜陽, 지금의 하남성 한성), 소군(邵郡, 지금의 산서성 고성)은 속속 서위에 투항한다.


이를 계기로 고환은 포판으로 진군한다.


고환은 공격의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놀란다. 그리하여 선비족의 주력 병사 10만을 모아서 포판으로 출발시킨다. 이와 별도로 대장군 고오조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황하 이남에서 우문태를 막게 시킨다.



당시 서위는 가뭄으로 식량이 모자랐고 모집한 병사도 1만 명에 불과했다. 사실, 우문태의 동정은 그저 한번 위세를 보이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관중에 양식이 부족하였는데, 동위의 항농성에는 대량으로 곡식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식량을 빼앗기 위한 것이 큰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고환의 병사가 다가오자, 그는 이미 50여일을 머물렀던 곳에서 가득 싣고는 되돌아가 버렸다.


고환은 크게 손해를 보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군대를 지휘하여 포판에서 다시 황하를 건넌다. 다시 낙수를 건넌다. 10만 대군을 허원(許原)에 주둔시킨다. 그리고 우문태를 찾아서 보복하고자 한다.


고환 휘하 고오조와 후경은 식량이 모자란 서위의 상황을 보곤 장기전으로 갈 것을 권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황하를 건넌다.


위수 인근의 우문태 병사와 결전을 준비하자 고환 휘하의 도독 곡률강거가 권했다.

"위수가 휘어 도는 소택지에 갈대가 무성하고 진창이 펼쳐져 있어 병사들이 전력을 다해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은밀히 정병을 보내 장안을 엄습해 적들의 소굴을 뒤엎느니만 못합니다."

"불을 질러 적을 소살하는 게 어떻소?"

이때 후경이 바보 같은 말을 한다.

"우문태를 생포해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데 만일 숯처럼 타 버리면 누가 우리의 대승을 믿겠습니까?"

고환은 이 건의에 마음이 흔들려 별 대책 없이 진군했고, 곡률강거의 우려처럼 갈대숲에서 우문태 군이 뛰쳐나오며 고환군을 대파한다.


우문태는 당시 수중에 1만의 병마밖에 없어서 상호 간에 차이가 현격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부장인 우문심이 이렇게 말했다.

"고환은 황하 이북에서 민심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는 지모는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의 명을 따릅니다. 만일 자기 땅에서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가 그를 이기기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병사를 몰아서 서쪽으로 왔습니다.


선비족 간에 서로 싸우도록 한다면 이것은 백성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니, 마음을 하나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저 두태를 잃고, 곡식을 잃어서 체면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분하여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러한 화가 난 병력은 한 번만 싸우면 포로로 잡을 수 있습니다"

우문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정예 병사를 모아서 위수의 남안에서 건너 북안의 사원(지금의 섬서 대려현 남쪽)으로 갔다.


이곳은 고환의 대군과 60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대장인 이필은 다시 우문태에게 건의한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평지에서 대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의 동쪽 10리에는 위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적을 막을 만 합니다"

우문태도 맞다고 생각해서 군대를 다시 10리 보내어 물을 등지고 동서로 진을 펼쳤다. 이필은 서쪽의 방진을 지휘하고, 조귀는 동쪽의 방진을 지휘했는데, 모두 갈대숲에 매복해 있었고, 북소리를 신호로 적과 싸우기로 했다.


10월 2일 신시, 동위의 대군이 위곡으로 진격해들어왔다. 서위의 병사가 적은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서쪽의 방진으로 쳐들어갔다. 우문태는 적군이 온 것을 보고는 북을 울려 싸울 것을 독려했다. 우근은 병사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였고, 이필, 조귀의 매복 병사들도 갑자기 들고 일어났다. 이필의 철기는 동위의 주력을 막았다.


고환의 대군은 둘로 갈라지게 되었고, 서로 호응하지 못했다. 고환의 대장인 팽락은 창자가 나올 정도로 싸웠지만 결국 동위의 군대가 패했다. 고환은 밤을 새워 낙타를 타고 황하 서안으로 도망쳤고, 배를 빼앗아서 황하를 건넜다. 거의 전군이 몰살당했다.



여기서 고환은 갑사 8만 명, 군 장비 18만 점을 잃었고 우문태는 동위의 군량을 차지해 한동안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전에 우문태는 고환군이 지나갈 소택지에 매복할 것을 권한 이필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사원전투에서 우문태는 포로로 7만을 붙잡았고, 양초와 물자는 부지기수였다. 포로 중에서 2만명을 뽑아서 군대에 보충시켰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목은 고환이 이미 놀라서 혼비백산한 것을 보고는 추격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우문태는 고환이 반격하는 것이 걱정되어,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않는 법이라고 보고, 군대를 위남으로 되돌렸다. 이번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문태는 모든 병사에게 나무 한 그루씩을 심게 해서 전공을 나타냈다.


사원 전투의 의의는 고환이 서위를 삼키겠다는 의도를 철저히 깨트렸다는 점이다. 이로써 우문태의 권위는 확립되었고, 전쟁 후에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에 돌았다. 정치적인 위망도 날로 급증했다. 이후는 쌍방간에 밀고 당기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전략적으로는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서위는 동위군을 격파했지만, 이후의 전황은 서위에게 유리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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