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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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 멸망 직전, 모용선비, 동진 환온 북벌, 석민 반란 [23화]


태녕 원년(349) 5월, 석호의 아들이자 정실 소생으론 둘째인 석준이 황위에 올랐다.


석준은 곧 석씨 일가를 요직에 배치하며 제후왕들을 위로한다. 유황후와 장시에게 살해당한 석빈의 아들 석연을 황태자로 삼고 석감을 시중, 석충을 태보, 석포를 대사마, 석곤을 대장군, 석민은 도독중외제군사로 임명했으며 자신이 보위에 오르도록 공을 세운 이농도 원래의 관직으로 복직시켰다.


  • 당시 석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종실 제후왕들 또한 많았다.

계성의 패왕 석충은 5만의 정병으로 업성으로 진군했는데 업성에 다다르자 군세는 10만에 육박했다. 석준은 석충에게 친서를 보내며 형제의 우애를 역설하며 중병을 거느리는 것을 승인한다 했다. 


석충은 형제의 의를 생각해 뒤로 물러날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대장군 진섬 등이 강력히 반발하자 결국 『석준을 공격』한다. 그러나 대패하여 자신은 사사되고 병사 3만은 갱살됐다.




이에 수년간 이어진 내전이 끝나는듯했으나 모용 선비가 20만의 대병으로 후조를 압박했고 다른 제후왕인 장안의 석포 또한 근신의 목을 베며 석준 토벌에 열을 올렸으며 동진의 환온도 수춘을 거점 삼아 북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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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은 석포의 반란을 눈치챘으나 모른체 하고 『거기장군 왕랑』을 장안으로 보냈다. 석포도 석호를 속일 생각으로 왕랑을 받아들였지만 행동이 빨랐던 왕랑은 곧 석포를 제압한다.


장안 인근까지 진군해 영채를 차렸던 동진의 사마훈 또한 겁이 많았기에 석포가 붙잡히자 군대를 뒤로 돌려 완성을 치고 남양 태수를 죽인 뒤 양주로 철군했다.


모용 선비 또한 빠르게 석포와 동진의 군세가 꺾이자 군사적 움직임은 보이질 않았다. 석준으로선 크게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당초 석준은 유황후와 장시를 공격하며 업성으로 진공할 때, 석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대사가 성공하면 당신을 응당 후사로 삼겠소."


이 한 마디가 불고올 파장은 꽤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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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은 석륵의 양자로 원래 성은 염씨다.


석호처럼 전장터에서 굵은 전공을 많이 세워 휘하의 군세 또한 만만치 않아 석준이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석준은 이를 뒤늦게 기억해내어 전중원외장군, 관내후로 봉하고 궁중의 미녀와 금은보화를 내려 석민을 위로하지만 석민은 이미 마음이 상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또한, 석준도 석민이 부담스러워 좌위장군 왕란 등의 건의로 군권을 회수할 것을 꾀했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해 흐지부지 없던 일이 버렸으니 이는 곧, 후조의 멸망을 부추기게 된다.


석준에게 불만을 품던 시중 석감은 이 일을 석민에게 알렸고 『사공 이농, 우장군 왕기』 등도 몰래 이 모의에 합의했다. 후조의 수도 업성 내외에서 이 모의해 찬동하는 사람들이 많자, 행동으로 옮기는 데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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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군 장령 소해 등이 3천 명의 갑사를 이끌고 바둑을 두며 쉬고 있던 석준을 포위한 것이다.


"누가 모반한 것인가?"


장령들이 말했다.


"의양왕 석감이 응당 보위에 올라야 하오."


석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해 놓고 너희들이 석감을 옹립할지라도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곧 병사들은 석준을 곤화전으로 끌고 가 난도질했고, 태후 정씨와 태자 석연을 비롯해 좌위장군 왕란 등도 모두 병사들에게 끌려가 참수됐다.


석준이 유황후를 몰아내고 보위에 있은 지 고작 183일밖에 되지 않았던 날이다(태녕 원년(349)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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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감은 곧 보위에 오르고 석민을 대장군, 무덕왕, 이농을 대사마, 녹상서사에 임명했다.


동상이몽. 석감, 이농, 석민은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권력욕이 높은 세 사람이 함께 권력을 잡자 더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석감은 이농과 석민을 죽여 자신의 황위를 탄탄히 하고자 했다. 이전에 석준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던 장안의 석포를 부추겨 이농과 석민을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군세가 심상치 않아 신흥왕 석지를 이용해 강족 요익중, 저족 포홍 등을 포섭하고 각지에 격문을 보내 석민과 이농을 토벌하기 위한 거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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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호응한 종실 석성, 석계, 석휘 등은 나이도 어리고 판단력도 미숙해 노련한 석민과 이농에게 목이 떨어지고 만다.


석민의 위세가 더 커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자 용양장군 손복도가 갈족과 결탁해 이농부터 죽이려 했으나 석민과 이농은 3천여의 갈족 병사들을 도륙하고 석감을 더 강하게 압박하게 되었다.


이후 권력을 손에 쥔 석민은 황제 석감을 연금한 뒤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업성 내에서 이같이 하령했다.


"근일 손복도 등이 모반을 꾀했으나 일당 모두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나머지 사람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오늘 이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성에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밖으로 나가도 좋다."


이에 한족은 입성하고 갈족을 포함한 호인들은 성 밖으로 나가느라 문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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