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흔적 (관람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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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명전 예원학교 경운궁[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덕수궁 중명전 德壽宮 重明殿

Jungmyeongjeon Hall of Deoksugung Palace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에 포함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 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 만희당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 이후 중명전 이외의 건물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고종이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덕수궁 중명전 전시회[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주최 : 문화유산국민신탁

주관 : 문화재청

협찬 : 시공테크

장소 : 덕수궁 중명전, 국민의 빛으로 역사의 빛을 더하다


덕수궁 중명전 고종 초상[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칠언시七言詩

서광범(徐光範, 1859~1897), 19세기 후반


  • 소주(蘇州)의 옛 봄날 같이 놀던 때
  • 갈대 연 가득하고 버드나무 늘어진 호수가
  • 낙양(洛陽)의 벗들이 내 소식 묻거든
  •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 항아리에 있다고 전해주오.
  • 무결거사 서광범(無結居士 徐光範)


서광범이 여러 작가의 시를 모아 다시 만든 작품이다. 이 시詩의 1, 2행은 당대唐代 허혼許渾의 시 경구한거기경락우인京口閑居寄京洛友人, 함양성동루咸陽城東樓, 3, 4행은 왕창령王昌齡의 시 苵莕樓宋辛浙이다. 서체書體는 행초서로서 필법이 옹골차다. 안진경顔眞卿의 유석암劉石菴의 필의筆意에 가까운데, 특히 개화파 인사 중 서광범의 필적이 희소하여 이 작품의 가치는 매우 높다.


서광범(徐光範, 1859~1897)은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위산緯山이다. 순조 때의 영의정 서용보徐龍輔의 증손이자 이조참판 서상익徐相翊의 아들이다.


중명전 정면 을사늑약[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이 강하였고, 1879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4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9월에는 또다시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신진 문물을 견학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6월에는 보빙사 민영익閔泳翊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 영향을 받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개화사상 역시 남달리 강하였다.


중명전 덕수궁 역사 굴육[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1884년 12월에는 당시 고급 양반 자제 출신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젊은 개화파들과 합세하여 보수 정권을 타도하고 근대식 개혁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사하였다.


갑신정변은 이른바 '우정국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우정국郵政局 개국식을 하는 행사 시간을 이용하여 궁중에 불을 지르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여 고급 관료들을 현장에서 살해하는 거사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혁신 정부의 조직을 발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서광범은 좌우영사겸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 대리외무독판代理外務督辦직을 맡았다. 그러나 거사 계획의 부실과 외세와의 연계가 견고하지 못하여 청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천하'의 실패로 끝나자, 일본 세력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본국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태로움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서광범 칠언시 덕수궁 중명전[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진충보국盡忠報國

김옥균(金玉均, 1851~1894), 19세기 후반


김옥균이 해행서楷行書로 쓴 진충보국 대자大字 현판懸板이다. 내용을 풀면 다음과 같다.

진충보국盡忠報國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


김옥균은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등으로 부터 개화사상을 배우고 실천한 개화사상가이자 실천자다. 직접 일본에 가서 근대화 실정과 명치유신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는 도중 임오군란이 일어나 귀국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務衙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신교육 실시 등을 주장 실천코자 하였지만 청국(중국 청나라)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을사늑약 중명전 굴욕[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중명전 정면 민씨 정권[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민씨 정권을 재수립한 청국은 조선을 속방화하기 위해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을 탄압하였던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민씨 수구파 정권을 제거하였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났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다시 상해로 갔으나 민비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중명전 관람안내 월요일 휴관[을사늑약 비극] 덕수궁 중명전, 고종 퇴위


중명전 관람안내

관람료 : 무료

관람시간 : 09:30~17:30 (입장마감 17:00)

안내해설


화~금

 14:00, 15:30 (2회)

토, 일

 11:30, 14:00, 15:00 (3회)

공휴일

 14:00, 15:30 (2회)


회당 소요 시간 35분

참여 인원 20인 이내 (선착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덕수궁 중명전 전시회, 진충보국 김옥균, 칠언시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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