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혼후 소보권 몰아낸 양나라 무제 소연 [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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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는 제나라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후 상서령, 위위에 임명됐으나 소보권의 심복들은 그를 꺼려 죽이려 했다.


"소의는 소란이 울림왕을 폐립 한 것을 흉내 내려 합니다!"


이에 소보권은 소의(양나라 무제 소연의 친형)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의는 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는데, 아무리 봐도 소의는 앞뒤가 꽉 막혀 도무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고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상서령이 어찌 반기를 들어 도주할 수 있겠는가?"


당시 제나라엔 경릉팔우竟陵八友란 영명체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있었다. 왕융王融, 사조謝朓, 범운范雲, 임방任昉, 심약沈約, 육수陸倕, 소침蕭琛, 소연蕭衍이 그들이다.

이중 사조는 명문 사씨 일가의 자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인 유욱의 목을 벤 왕경칙의 사위이기도 했다. 사조는 본디 겁도 많고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라 장인 왕경칙을 모반 혐의로 고발해 소보권이 재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왕경칙을 죽게 한다.


위진남북조 남제 경릉팔우위진남북조 남제 경릉팔우


위진남북조 시대 명문 사씨 일가의 사조위진남북조 시대 명문 사씨 일가의 사조


이후엔 강석, 강사, 시안왕 소요광 등과 모반을 꾀했으나 이내 배신하다 소요광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남제 경릉팔우 중 다른 한 사람인 소연은 적극적으로 움직여 실패하지 않는다.


영원 2년(500) 10월, 소의가 소보권의 사약을 마시고 죽자 이미 사망한 소의와 나포되어 살해된 소융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형제는 근거지 인근을 점거한 채 저항하거나 향리에 몸을 숨겼다.


이중 훗날 양나라를 세우는 소연은 직접 기병하여 남강왕 소보융을 천자로 받든 뒤 건강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병력 3만, 기마 5천두, 배 3천 척이었다. 소보권의 전횡으로 소연에게 투항하는 이들이 많아 경릉, 강릉, 한구, 영주 등을 빠르게 점령하고 건강에 이른다. 

당시 서역의 비단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을 서방으로, 서방의 금은 그릇과 유리제품들을 중국으로 옮기는데 상당한 활약을 한 소그드 상인(호인胡人이라 부르는데, 비중국인을 지칭함. 호객胡客, 상호商胡, 호상胡商으로 불리기도 함)들이 있었다. 이들은 먼저 북위의 수도 낙양이나 북제의 수도 업에서 주로 활동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소그드 상인.위진남북조 시대의 소그드 상인.


북위가 동과 서로 나뉘고 전쟁이 자주 발발하자 일부 일족은 남으로 이동하여 제나라 양양 일대에 거주했다. 대표적인 건 코칸드 출신의 강씨康 일족으로, 이들은 이미 중계 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쌓았고, 그 부를 토대로 이번엔 강남의 비단 제품을 서방으로 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소연이 군사를 일으켜 건강으로 향할 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었던바, 소연은 상업자본기인 강씨 일족을 받아들여 군자금의 상당 부분을 충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나라의 기반이 된 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시 소연은 다른 제후왕들보단 수월하게 거병한 셈이다.



영원 3년(501) 10월, 소보권이 정로장군 왕진국 등에게 명해 정병 10만 명으로 영격케 하지만, 소연의 병사들이 분전해 소보권의 군사가 궤주했다. 곧 소연은 건강성을 포위한 채 6개 대문을 일시에 공격했다. 당시 궁 안에는 남제 병사 7만여 명이 있었지만 소보권은 여전히 전투 놀이를 하며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다.

소연의 장수 진현달과 최계형 등이 건강성 내의 많은 병사를 보곤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소보권은 승리를 거둔 후 사용할 요량으로 미리 금은보석으로 조각한 3백 명분의 의장용 갑옷을 만들도록 명했다. 성안의 백성들이 이 얘기를 듣고 크게 분개하며 투항할 생각을 품었으며, 여법진과 매충아가 이런 것을 권하기도 한다.


"대신들이 진력할 생각을 하지 않아 반군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응당 장수들을 모두 죽여 버려야 합니다."


소보권은 미루는 태도를 보였으나 소연에게 패배한 왕진국 등은 피살될 것을 우려해 환관 및 시위들과 밀모해 먼저 손을 쓰기로 했다. 당초 여법진 등이 장수들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군비와 포상을 권했지만 소보권을 이를 거절했었다.


"역적들이 오면 오로지 나만을 잡으려 할 것인가? 어찌 내게 와서 재물을 요구하는가!"


12월 병인일 밤, 후합사인 전강, 시종 풍용지 등이 외부의 반군과 호응한다.


한편, 환관 황태평이 병사들의 이동 소리에 놀라 도주하는 소보권의 무릎을 다치게 한다.


"네놈들이 모반하려는 것인가?"


연주의 중병참군 장제는 이미 넘어진 소보권을 목을 베었다. 당시 남제 황제 소보권(동혼후)의 나이 고작 19세였다.


병사들이 그의 목을 기름먹인 누런 명주로 싼 뒤 소연에게 보내며 투항 의사를 전했다. 소연은 입성하여 반귀비, 여법진, 매충아 등 41명을 참하고, 마지막 제나라 황제인 화제 소보융을 즉위(501년) 시킨다.



중흥 2년(502) 3월, 소보융을 폐위하고 양나라를 세운다. 그가 바로 불교를 극도로 신봉한 양무제 소연이다. 소연의 부친 소순은 제고제 소도성의 족제에 해당할 뿐, 정통 황실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소연은 국호 양나라로 바꾸며 정계의 은행들을 내쫓고 군무만 앞세우는 무장보다는 무장 가문과 하급 귀족 가문의 교양있는 견실한 이들을 중용한다.


위진남북조 시대 중기, 남제 제나라는 멸망하고 양나라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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