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견의 수나라 건국, 남조(양나라) 권력을 잡은 진패선 [102화]

북주 외척 양견, 수나라 세우다

양견(수문제)이 정권을 장학한 581년 2월 13일, 양견은 외손자 정제(우문연)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세운다.

정제(우문천)는 개공介으로 봉해졌지만 5월에 살해된다. 양견은 우문태의 자손 27명, 효민제의 아들 1명, 명제의 자손 7명, 효무의 자손 12명, 정제의 형제 2명, 기타 종족 12명을 살해하여 위진남북조 여느 왕조처럼 우문씨의 씨를 말렸다. (훗날, 양견의 다섯 아들도 일찌감치 사망한다. 뿌린 데로 거두는 법)

 

양견은 수나라 왕조를 개창한 뒤 유가 사상을 기반으로 조세와 법률을 정비한다. 구품관인법을 폐지하고 과거를 시작했는데 이미 귀족제 사회가 무너졌기에 중정관이 관리 후보자를 추천할 필요성이 없었다.

 

이후 수문제 개황 7년(587), 강릉의 괴뢰 정권인 후량을 멸망시키고 이듬해엔 수춘에 전선 총사령부를 두고 남조의 진나라를 토벌하러 나섰다. 둘째 아들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수나라에선 51만8천의 대군을 파병하여 진후주 진숙보를 사로잡으며 마침내 위진남북조 시대 천하 통일을 이루게 된다.

 

중국 드라마 독고황후 속 양견 , 독고황후
중국 드라마 독고황후 속 말년의 수문제 양견

남조 양나라

남조의 양나라 말기, 황실 소씨 일가는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는 데엔 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조정에 대한 충성심은 극도로 낮았다. 동진 시기, "의리"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일부분 벗어났던 군벌 세력이 황제의 종친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서진 이후로 강남 전통 귀족들은 몰락하고 그 자리를 대치한 건 군공을 세운 무장들이었다.

 

송, 제를 거치며 무장들도 군권을 황실의 종친들에게 빼앗겼으니, 강남의 왕조들은 끝끝내 하나로 통합된 힘을 갖지 못한 채 북방의 수나라에 합쳐진다. 남조의 마지막 국가는 진패선이 세운 진陳나라이다. 유유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집안의 출신인 무관 진패선은 신유후 소영이 오흥 태수로 있을 때 예물을 바쳐 그의 막료가 되었다. 이미 그 이전에 여러 곳으로 뇌물을 보내 건강에서 낮은 관직을 얻기도 했으며 하층민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소영은 진패선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었다.

남조 양나라 전쟁 영웅 진패선

진패선 - 진나라 건국자

양무제의 대동 연간에 소영이 광주자사가 되자 진패선은 중직병참군에 임명됐는데 일종의 보위단 단장을 뜻한다. 영남(광동성)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주자사 노자웅이 토벌에 나섰다 패했으나 진패선은 3천 정병으로 진압하여 직각장군으로 승진한다. 소영이 병사하자 영구를 건강으로 호송하는 도중 이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여 진원장군 고요 태수에 임명된다. 조정은 그를 인정하여 고요 주변 7개 군의 군사를 총괄케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 양나라(양무제 시기)에서 후경의 난이 일자 무뢰배와 광주일대의 시흥 지방 토호들을 중심으로, 종실 소발을 광주자사로 삼아 후경과 내통하던 원경중을 공격해 자진케했다. 얼마 후, 권력이 커진 진패선을 의식한 소발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진패선은 이미 휘하에 많은 장병과 책사들을 모아두었기에 양원제 소역과 건강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소역은 그를 장성현후에 봉했다. 이후 소역이 서위의 군사에 항복하자 강주자사이자 양원제 소역의 9자인 소방지를 옹립하니 조정의 대소사는 진패선과 왕승변 두 사람에 의해 처리된다. 이후 북제가 포로로 잡았던 소연명을 황제로 삼아 건강으로 보내자 왕승변은 이전에 옹립한 소방지를 황태자로 낮추고 자신은 시중이 되었다.

 

진패선은 소방지를 패하고 소연명을 받아들인 건 잘못이라고 왕승변에게 누차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둘 사이는 소원하게 되었다. 전장에서 쌓은 우의는 이 일로 깨진다. 흑심을 품은 진패선은 고숙에 군량을 보내며 거짓 믿음을 샀고 북제의 침공을 대비해 경구로 움직인다.

 

양나라 마지막 황제 경제 소방지

그러나 이는 건강의 왕승변을 급습해 제거할 의도였다. 후안도, 주문육과 은밀히 계책을 마련한 뒤 야간에 출병한다. 당시 진패선이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않자 대로한 후안도가 진패선을 향해 욕을했다.

"오늘 거병하리고 했으니 사세가 이미 형성된 것이오. 반드시 생사를 결단해야만 하오. 만일 실패하면 모두 함께 죽는 것이오. 당신이 유예한다고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소!"

진패선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책망하는 것이오!"

이어 이들은 건강의 석두성 북쪽에 도착한 후 몰래 건강성 안으로 침입해 남문을 열어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늦은 시간까지 공무를 보던 왕승변은 황급히 친병 수십 명과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다.

 

당시 진패선과 후안도가 이끄는 부대의 병사들은 북으로 향할 줄 알았으나 남으로 내려와 어리둥절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진패선이 말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제나라 군사와 함께 나를 치려고 했던 것인가?"

왕승변을 꾸짖은 뒤 그를 목 졸라 죽인 진패선은 북제(위진남북조 시대 고씨)에 번국을 칭하며 소연명을 사도로, 소방지를 다시 황제로 세운다.

위진남북조 시대 말기 북주 북제 진나라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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