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효문제 평성에서 낙양 천도: 한화정책 시작 [67화]
- 한중일 역사 / 위진남북조 100화
- 2020. 4. 2.
5호16국 시대를 끝내고 시작된 위진남북조 시대
효문제 태화 17년(493), 북위 황제 효문제(탁발굉)는 낙양 천도를 결정했다.
"평성은 매우 한랭했다. 6월에도 비와 눈이 내리고,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이에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사서인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기후로 인해 천도를 결정한 것이나 내막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선비족 북위의 초기 수도 평성. 다퉁시.
국력이 커질수록 수도인 평성으로 몰려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들이 머물 집과 식량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축으로 식량을 옮기더라도 중간의 소진분이 너무 커서 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북쪽의 유연과 수도의 거리가 가까웠고, 북중국 통일 이후엔 국가 유지를 위한 행정의 문제도 생겼다. 이에 북위 효문제는 낙양 천도를 결정하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전에 북위 중신들 사이에선 만약 "수도를 이전한다면" 낙양이 좋을지 업도가 좋을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낙양은 한, 진의 통일 왕조 수도로 이미 인프라가 구축되어 수도로 삼는다면 인프라 투자에 대한 비용이 적었다. 이미 낙양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낙양이 갖는 전통적 의미가 뚜렷했다. 업도는 산천이 험준해 방어에 이점이 있고 물산도 풍부하며, 하북에선 장수를 이용한 수륙 교통의 중심지로 불렸다.
5호16국 시대 종결 이후 벌어진 최초의 수도 이전 사례
장수는 발해만에서 관중까지 이르는 긴 줄기를 갖기에 국가를 대표하는 강으로서의 의미도 뚜렷했다. 북위 중신들의 이같은 논쟁의 결과는 "그래도 낙양이 낫다"였었다. 효문제 탁발굉도 당시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진 않았으나 이런 중신들의 논쟁에 상당히 귀를 기울였을 가능성이 크다.
[북위 평성 유적지]
태화 17년(493), 효문제는 유송을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세운 소도성의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숙부인 임성왕 탁발징이 반대하자 효문제가 몰래 속마음을 밝혔다.
"짐은 남정을 명분으로 내세워 중원으로 천도고자 하는 것이오. 경은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북쪽 사람들이 장차 옛 땅을 그리워하며 동요할 터인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비상한 일은 비상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폐하는 성스러운 기지로 독단하십시오. 그들이 이를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임성왕은 참으로 나의 장량이오!"
탁발굉은 곧 3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명분은 위진남북조 시대 통일이었다.
북위 30만 대군의 이동 경로
10월, 대군이 낙양에 이르자 폭우가 쏟아졌다. 탁발굉은 전군에 하령해 속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명했고, 남정의 연극을 꾸민 이충과 탁발정이 속내를 드러낼 시기라며 간접적으로 말을 했다. 이에 눈치를 채고 탁발굉은 본심을 말한다.
"짐은 누대에 걸쳐 삭방에서 살아온 까닭에 남쪽 중원으로 천도코자 했다. 만일 경들이 짐의 남정을 반대한다면 우리가 낙양으로 천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탁발정이 이를 거든다.
"만일 폐하가 남정을 중지하고 낙양 천도를 감행한다면 이는 신들이 원하는 바이고, 만민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쟁할래? 아니면 여기로 수도를 옮길까? ... 당시의 북위 사람들은 덜 해롭다고 판단한 천도를 선택했다.
11월, 상서 이충과 장작대장 동이 등이 낙양의 도성을 쌓기 시작했고, 다수의 군신이 평성으로 귀국해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 평성은 이로써 위진남북조 시대 수도로서의 위상은 사라진다.
[5호16국 시대를 마친 북위 평성 유적지]
연등을 든 여인상 - 불교 유물
다퉁시 평성 유물
다퉁시 평성 유물 - 불교 유물
다퉁시 평성 유물 - 장군상
돼지, 곰
다퉁시 평성 유물 - 동물, 개 멍뭉이
이듬해인 태화 18년(494) 봄, 임성왕 탁발징의 도움으로 북위 선비족 구신들을 설복했다.
이로써 북위는 반강제적인 한화정책과 수도 이전이 완료되었다. 효문제는 이에 멈추지 않고 더 강력한 한화정책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