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헌제의 조비가 된 북제(동위) 황제 고양 [95화]
- 한중일 역사/위진남북조 100화
- 2021. 2. 8.
조조는 생전에 칭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문서를 통해서만 아들(조비인지 누군지 하여간 누가 됐건)이 찬위할 여지는 남겨두었다. 5호 16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막바지에 동위를 지배한 고환도 조조와 마찬가지였다. 고환은 하급 소대장 출신으로 이주씨가 효무제 원수를 옹립하자 효정제 원선견을 옹립했었다.
동위 효정제 무정 2년(544), 고환이 아들 고징을 대장군, 영중서감, 섭이부상서에 임명했다. 고징은 옛 친구들이 자신에게 무례하거나 뇌물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고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공들은 되도록 내 아들을 피하도록 하시오."
고징은 고환 사후 지방의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되어 발상을 미뤘다. 실제로 하남에서 반란(후경)이 일어나자 한궤에게 명해 이를 토벌하고 더 많은 관직을 얻어냈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던 고징은 효정제 원선견도 안주에 두지 않았다.
황제를 때린 고징
어느 날, 동위 효정제와 고징이 업성 동쪽에서 사냥할 때 효정제가 급히 말을 몰아 달려가려고 하자 감위도독이 뒤에서 황급히 외쳤다.
"천자는 빨리 달려 나가지 마시오! 대장군이 싫어합니다."
사냥이 끝난 후 연회 자리에서 고징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은 후 효정제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신 고징은 폐하가 이 술을 다 마실 것을 청합니다."
"자고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소. 그러나 짐이 이렇게 살아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체면을 상했다고 생각한 고징이 화를 내며 욕을 했다.
"짐, 짐, 무슨 개똥 같은 짐인가!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고징은 곧 최계서에게 명해 황제를 주먹으로 세 번 때리게 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다음 날, 고징은 최계서로 하여금 황제 원선견을 위로하도록 했고 황제 원선견 역시 사과하고 최계서에게 견 100필을 상으로 내렸으나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사령운(위진남북조 시대 남제 인물, 명문 사씨 일가의 천재 문장가였으나 탐욕을 부리다 목숨 잃음)의 시를 읊었다.
한韓이 망하니 자방(장량)이 떨치며 일어났고, 진秦이 황제를 칭하니 중련(노중련)이 부끄러움을 느꼈네
본래는 강가와 바닷가 사람들이었지만, 충성과 의리는 군자들을 감동하게 하네.
기울어가는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의 시를 읊었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고환 장남 고징의 비극
동위 효정제 무정 7년(549) 5월, 고징이 상국이 되어 제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9월 난경이라는 주방장의 손에 죽었다. 난경은 원래 양나라 대장 난흠의 아들로 교전 중에 포로가 돼 동위로 끌려와 고징의 주방 노비로 일했다.
어느 날, 찬위 모의를 하던 중 난경이 고기를 담은 쟁반을 들고 안으로 갔을 때 고징이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어젯밤 꿈속에서 이자가 칼로 나를 찌르는 거야. 그래서 내가 곧바로 그를 죽여 버렸지!"
이미 고징을 죽일 계획을 구상 중이던 난경은 매우 놀랐다. 이에 주방에서 몇 명의 무리를 모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네가 어찌 감히 들어오는 것인가!"
"너를 죽이려고 왔다!"
고징은 상 아래로 들어가다가 칼을 맞았고 함께 있던 진원강은 즉사했다.
최계서와 양음은 간신히 달아났으나 고징은 상처가 낫질 않아 이내 숨을 거둔다. 어이없이 고징이 죽자 그 동생 고양이 뒤를 이었다. 그에겐 물고기 비늘이 있고 복사뼈가 두 개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요즘으로 치면 지루 피부염과 신체의 기형이 있었던 건 아닌지 추측된다.
조비처럼 찬탈한 고양
고양은 형이 죽자 곧바로 명을 내려 난경을 죽이고 상국, 제왕에 올랐다. 동위 효정제 원선견은 고징이 죽자 크게 기뻐했으나 이는 조조가 죽자 기뻐한 한나라 헌제와 다름이 없었다. 고양은 형에게 순종했는데 친형인 고징이 그를 의심했었기 때문이다. 아래 두 사례를 통해 고양의 인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하루는 고양이 부인 이씨를 위해 좋은 옷과 완구를 만들었는데 형 고징이 번번이 그것을 빼앗아갔다. 당연히 이씨는 남편 고양에게 하소연했다.
"이 물건은 오히려 구할 수 있고, 형이 필요한 것인데 어찌 인색한 것을 용서하겠는가?"
고양은 오히려 형을 이해하라며 부인을 다독였을 뿐이었고, 이후 형에게 분한 일을 겪게 되면 웃통을 벗고 맨발로 펄쩍 뛰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를 위해 놀이를 좀 했소."
효정제 무정 8년(550) 5월, 서지재와 조정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고양은 진양궁에서 효정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르니, 그가 북제 문선제이다.
"설령 부형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응당 존위에 올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아버지와 형에 미치지 못하니 황제가 되어 권위를 세우면 이를 만회하고도 남는다는 의미였다. 이에 동위는 멸망하고 북제가 탄생한다. 효정제 원선견은 이듬해에 독살된다.
북제는 수도를 육조고도六朝古都라 지칭되는 업鄴으로 삼았다. 춘추 시대 환공의 제나라, 후한 말기 조조의 위나라, 오호십육국 시대의 후조, 염위, 전연, 북제(동위) 까지 오래도록 한 국가의 수도로 명맥을 이어오다 수나라 문제가 불길한 기운이 있다며 불살라 버리기 전까지 북중국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서쪽으론 산동과 산서를 나누는 태항산맥, 북쪽으론 고산鼓山, 남으로는 장수漳水가 흐르는 천험의 요새와도 같았으며, 경계를 넘으면 어디로든 향할 수 있는 교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런 업도는 북제의 멸망과 함께 시골의 한구석으로 전락하니 위진남북조 시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도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