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난에 일어난 2가지 충격적인 일화, 서진 치감과 등유

영가의난에 일어난 2가지 충격적인 일화, 서진 치감과 등유


이 포스트에서 소개하는 영가의난 2가지 충격적인 일화는 유송의 황족 유효표 주도로 만들어진 세설신어가 출처입니다.


세설신어 上, 덕행德行편, 24화

치공郗公(치감郗曇, 환온의 측근인 치초의 아버지인 치음의 동생, 치초의 작은아버지)은 영가의난永嘉之亂을 당하여 고향에서 굶주림으로 매우 고생하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은 치공이 훌륭한 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돌아가면서 차례로 치공을 먹여주었다. 어느 때 치공은 형의 아들인 치매郗邁와 생질인 주익周翼 등 두 아이를 데리고 얻어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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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고향 사람은 말했다.


"실은 우리도 굶주리고 있습니다. 선생은 현자賢子이시기에 우리가 모두 도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데리고 온 아이들까지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치공은 혼자 가서 먹되, 그때마다 입안 가득 밥을 물고 왔다가 토해내어 두 아이를 먹였다.


그 후(영가의난 이후, 동진 시대를 말함) 모두 살아날 수 있게 되었고 함께 강남江南 땅으로 건너갔다. 치공이 세상을 떠나자 주익은 섬현령剡縣令으로 있었는데 그 벼슬자리를 내놓고 돌아왔다. 그리고 치공의 영전에 상석喪席을 깔고 3년 동안 심상心喪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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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신어 上, 덕행德行편, 28화

등유鄧攸는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갈 때 도중에서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동생의 자식을 데리고 갔다. 강남에 간 다음 첩을 얻었는데 그 첩을 총애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묻자 첩은 자기도 북쪽 사람으로서 난리(영가의난)를 만나 피해 왔다고 하면서 부모의 이름을 기억한다며 대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등유의 조카딸이었다.


등유는 본디 덕행이 있으며 언행에 신중했던 사람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는 슬피 탄식했거니와 그 후 평생을 두고 첩을 얻지 아니했다.


유효표의 주해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영가의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등유는 길이 워낙 멀므로 수레를 부숴 버리고 소와 말에 처자를 태워 도망시켰다. 도적은 그의 소와 말을 약탈했다. 등유가 처에게 말했다.


"내 동생은 일찍이 죽었고 오직 그 유민遺民만 남아 있구려. 이제 걸어서 도망을 치는데, 우리 아이와 그 아이 등 두 명을 데리고 간다면 둘 다 죽이고 말 것이오. 그러니 우리 아이는 버리고 조카만 데리고 갑시다. 우리는 또 앞으로 아이가 태어날 테니 말이오."


아내는 그 말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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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서中興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등유는 자기 아들을 풀숲에 버렸는데 아이는 울면서 뒤따라왔고 해 질 무렵에는 마침내 따라잡았다. 이튿날 등유는 그 아들을 나무에 붙잡아 매고 떠났으며 끝내 강남으로 건너갔다. 상서좌복야尙書左儀身에 이르러 사망했다. 동생의 아들 등수鄧綏는 등유를 위해 3년간 재최상齊衰喪을 치렀다.'' (영가의난 이후 동진에서 치뤘다는 의미)


음....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벌어진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전쟁 중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특이하네요. 6-25 한국전쟁 시기에도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재혼을 했다가 병원에서 재회한 일화도 있었죠. 전쟁이란 거 사람을 참 엽기적으로 만드네요.


세설신어, 안길환, 명문당, 42p~43p

세설신어, 안길환, 명문당, 51p~53p

영가의난에 일어난 2가지 충격적인 일화, 서진 치감과 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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