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등국 3년(386년), 북위의 정벌로 인해 고막해와 분리된 거란족은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점차 세력을 회복하면서 북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고팔부古八部 시절 거란족과 선비족(북위), 거란과 북제


북위의 세조 탁발도 태연 3년(437)에 거란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쳤다.

태평, 진군 연간(440~450)에는 좋은 말을 매년 공납했다.

현조 탁발홍(466~470 재위) 시기에 거란족은 북위와 이미 여러 해 동안 왕래하면서 마침내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여러 나라의 말석에 끼여 향응에 참가하는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古八部의 연맹 단계에 해당한다. 고팔부의 명칭과 관련해 위서의 현조기와 거란전 및 책부원귀 요사의 영위지와 세표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고 있지 않지만,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성격에 관한 연구도 학계의 주의를 끌고 있다.

북위와의 사신 왕래, 조공, 호시 및 인근 부족의 습격에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각 부는 점차 밀접하게 연계되어 약 460~470년대에는 거란족을 핵심으로 하는 고팔부의 연맹이 조직되었다.


고팔부는 강한 이웃 국가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조직된 느슨한 부락 연맹이었는데, 거란이 당시 연맹의 핵심이었으며 그 수령은 선거로 뽑았다. 선거제와 관련해 거란국지에는 "각 부에서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자를 뽑아 수령으로 추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이민족 역사 거란 북제 선비


평시에 각 부는 각자의 수령인 막하불의 영도하에 "추위와 더위를 피해 물과 풀을 따라 목축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목축업은 그들의 주요 경제 활동이었고 당시 가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생산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다. (고팔부 시기)


천보 4년(553년)에 북제가 거란족을 격파하면서 획득한 포로가 10여 만 명, 가축이 수십만 마리에 이른 것을 볼 때, 한 사람당 수 마리 이상의 가축을 소유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어렵고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예컨대 거란인은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산사람을 보호해 주고 사냥을 통해 돼지와 사슴을 많이 잡게 해달라고 항상 기원했다. 그리고 수레는 아주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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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태화 3년(479년)에 거란족 막하불 물우가 이끌고 귀순한 무리가 1만여 명이고, 수레는 3,000승이었다. 도구의 개선, 기술의 진보 및 생산성의 향상은 그들에게 비교적 많은 축산품과 수렵물을 제공했으며, 이는 또한 좋은 말과 많은 담비를 북위에 조공할 수 있게 했다.


물질생활이 개선되면서 고팔부의 생산품을 가지고 중원의 농업 및 수공업 제품과 교환하려는 욕구가 생겼다. 부락의 발전과 실력의 증강 및 외부와의 연계가 빈번해지면서 이러한 요구가 가능해졌다. 조공, 회사, 호시 무역은 그들이 중원과 물질적으로 교류하는 주요한 방식이었고, 약탈도 이러한 요구를 실현하는 보조적인 경제적 수단이었다.


출처 : 요-금의 역사, 이계지,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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