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풍태후와 효문제: 유연, 후베이성 정벌 (고구려 지두우)[66화]


북위 헌문제 연흥 6년(476) 8월, 풍태후가 술에 독을 타 헌문제 탁발홍을 살해한다. 풍태후는 태황태후가 되어 국가 대정을 장악했고 보위에 오른 효문제 탁발굉은 12세에 불과했다. 북위 효문제 탁발굉은 황제가 되어서도 풍태후(문명태후)한테 체벌 당하며 성장한다. ㅠㅠ


이 일이 있기 12년 전인 문성제 화평 5년(464), 위진남북조 시대 유연의 가한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予成이 뒤를 잇고 자신을 수라부진가한이라 칭하며 연호를 영강永康이라 하였다. 이전의 가한처럼 그도 북위의 북방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6년 뒤인 헌문제 황흥 4년(470), 경조왕 원자추, 동양공 원비, 임성왕 원운, 여음왕 원천사, 제남공 나오발, 농서왕 원하에게 명해 태무제 탁발도 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연 토벌에 마침표를 찍는다.


"병사의 운용은 기이한 계책에 있지 병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들은 짐을 위해 힘써 싸우시오."


선봉에 나선 원하가 승전을 거듭하며 북방으로 30여 리를 추격해 5만여의 수급을 얻었다. 19일 동안 6,000여 리를 왕복하며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북정송北征頌을 지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념하였다. 이후로 유연은 세력이 급격히 약화하여 효문제 이후로 북위를 향해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게 된다.



탁발홍을 독살하고 정권을 장악한 풍태후는 전횡을 일삼지 않았다. 오히려 왕예와 이충이란 뛰어난 신하를 총애했다.


태화 2년(478), 풍태후, 효문제, 백관, 궁인들이 우리 속의 호랑이를 구경하다 한 마리가 우리를 뛰어넘어 왔다. 위사와 궁인들이 모두 놀라 도망쳤지만 왕예 만이 화극을 휘두르며 호랑이의 접근을 막았다. 이충은 토지와 호적 제도를 개혁해 호족들이 발호한 근거를 제거하는 한편 국가의 재정을 튼실하게 만들었다.

북위의 조정 제도에 의하면 황제는 왕공 중신들을 대할 때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지만, 효문제 탁발굉은 유독 이충만을 이중서라 부르는 파격을 보인다. 위진남북조 시대 통틀어도 파격적인 대우였다.


태화 3년(479), 고구려가 몰래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를 취해서 나누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실제 군사를 움직여 지두우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거란 등을 인근 유역에서 내쫓았다. 당시 거란의 막불莫弗 하물우가 수레 3천 승, 무리 1만여 명과 여러 가축을 몰고 복속해 들어올 것을 청하고, 백랑수 동쪽에 머물렀다.


태화 4년(480)환현의 아들 환탄을 선두에 세워 남제의 변경인 의양을 공격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군한다.


환현은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의 황위를 잠시 찬탈한 초楚나라의 황제이자 환온의 막내아들이다. 환탄은 연흥 연간(471~476)에 대양만(지금의 후베이성 인근) 추장으로 면수 이북, 치수, 섭현 이남의 8만여 부락을 장악하고 내속을 청했었다.


북위 조정은 정남장군, 동형주자사, 양양왕으로 삼으며 군현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당시 북위로선 남조와 국경을 맞대기보단, 환탄을 이용해 일종의 중립 지대에 영향력을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환현이 피살될 당시 환탄은 나이가 몇 살 되지 않아 대양만(지금의 후베이성 인근) 부족에게 흘러들어 가 숨어 살며 그 풍속에 적응하였다. 성장해서는 지략이 뛰어나 여러 만이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낭릉에 치소를 두었고 태화 18년(494)에 숨을 거두자 아들 환휘暉가 작위를 세습하였다. 환휘는 사후 관군장군에 추증되었다.



태화 8년(484), 백관들에 대한 녹봉제를 시행하여 국가 권력의 관료 통제도 가능해졌다. 이전에 북위의 백관에게는 봉록이 없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생활비용을 백성들에게서 수탈과 뇌물 또는 지방의 부호나 상인과 결탁하여 상업 행위를 통해서 조달하였다.


녹봉제 시행은 그 재원 확보를 위해서 증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녹봉 지급을 위한 증세는 소민의 세 부담을 더욱 불균형하게 하여 정부는 조속한 시일 안에 징세의 균등화를 도모해야 했다. 그리하여 토지 제도의 개혁이 필수였으며 이는 성공적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전쟁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경제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다.


태화 14년(490), 연흥 2년(472)부터 조공을 바치던 지두우가 돌연 변방을 공격한다. 이에 양평왕 원이가 이들을 공격해 제압하고 다시 조공을 받는다. (고구려 장수왕 압박과 유연을 피해 북위를 쳤을 가능성 높음)


풍태후는 어린 효문제를 직접 양육했다. 권계가 3백여 편과 황고 18편을 지어 교재로 쓰도록 했으며 유학을 존숭해 장안에 문선왕묘를 건립해 공자를 기렸다. 검박한 생활을 유지하기에 수라상도 간단했고 불교를 숭상해 많은 재물을 불당과 불상 조성에 바쳤다.


그런 북위 풍태후도 태화 14년(490)에 태화전에서 숨을 거두니 당시 49세였다.



효문제는 풍태후 사후 5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등 극도로 효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풍태후가 묻힌 영고릉을 여러 차례 참배하며 자신을 양육한 조모의 은공을 기렸다. 이로써 효문제는 진정한 의미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되어서도 맞으며 자란 위진남북조 시대 특이한 황제. 그 황제가 북위 효문제다. 그는 마음속에 있던 한화정책을 급속도로 시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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