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성(업도)에 동작대를 짓고 수도로 삼은 조조 (삼국지 도시)

업성(업도)에 동작대를 짓고 수도로 삼은 조조 (삼국지 도시)


조조의 업도(업성, 동작대가 있던 곳)는 고래로 이수난공易守難攻의 전략적 요충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쪽으로는 옛날 산동과 산서를 나누는 태항산맥太行山脈이 멀지 막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다. 삼국지 도시인 업도(동작대가 설치된 곳) 서북 15리, 태항산맥의 한 봉우리인 고산 아래의 골짜기에 위치한 부구형㵚口陘은,


"한 사람이 관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다"


는 험관으로 알려져 왔다.


[삼국지 조조] 업도, 업성의 동작대 상상도[삼국지 조조] 업도, 업성의 동작대 상상도


이 관을 넘으면 바로 산서고원의 상당上黨(장치長治, 창즈시), 평양平陽(임분臨汾, 린펀시), 진양晉陽(태원太原, 타이위안시)으로 연결된다. 조조의 업도를 감싸고 흐르는 장수漳水 혹은 장하漳河라고 불리는 강은 동으로는 발해, 남으로는 황하로 연결되는 하북 굴지의 수상 교통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 시대의 업현(업성)의 현령이었던 서문표가 하거河渠를 뚫어 장수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시설을 만든 후, 태항산맥을 옆으로 하며 남북으로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대평원은 하북 최고의 부서富庶 지구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지 도시인 조조의 업이 왕조의 수도로서 역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던 것은 후한 말이었고, 이름없는 시골 마을로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북제가 망하게 되면서였다.


즉, 위진남북조 시대와 더불어 등장했다가 그 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도시로서 역할을 다한 고도다. 중국의 역사지리학자들은 업을 아직도 칠대고도七大古都의 하나로 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업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남쪽에 위치한 은의 고도 안양 때문이다.


[삼국지 조조] 업성의 위치와 장강 줄기[삼국지 조조] 업성의 위치와 장강 줄기


기주의 주도 업은 애초 조조의 숙적인 원소의 근거지였다. 후한 말 각처에서 일어난 군웅들은 모두 사해혼일混一四海(여러 바다를 하나로 모음, 천하 통일을 의미)을 꿈꾸면서 할거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군웅들은


"나아가서 적을 이길 수 있고 퇴각해서는 굳게 지킬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했다. 당시 원소는 기, 유, 청, 병 4주, 즉 하북과 산서성 일대와 산동 동부와 북부를 거느리면서 천혜의 요충인 업(동작대가 있던 업도, 업성)을 장악하고는 이제,


"남쪽으로 향하여 천하를 다툴 수 있게 되었다."


고 만족해했다. 그러나 후한 헌제를 업고는 허에서 연주와 예주 2주, 즉 하남성 일대와 산동성 서남부를 통령하고 있던 조조와 중원의 패자 한 자리를 두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통일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중원의 패자가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원소와 조조는 삼국지 도시인 업과 허의 중간 지점인 관도에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한판 대결을 치르기에 이르렀다. 남하하던 원소 군과 북상한 조조 군이 이 지점에서 충돌하여 쌍방 모두 수십만의 군대로 십수 개월에 걸친 총력전을 펼쳤다. 전쟁의 결과는 하늘이 조조의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억울함에 피를 토하고 죽은 원소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조조는 업성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원소의 아들이 지키고 있던 업성은 견고하기만 했다. 조조는 토산을 만드는가 하면 지하도와 참호를 건설하고, 장수의 물을 끌어들이는 등 백방으로 업성을 함락하기 위해 노력했다.


[삼국지 조조] 관도와 허도 위치[삼국지 조조] 관도와 허도 위치


조조가 마침내 얻은 업성은 이미 폐허 그 자체였다.


조조는 폐허가 된 업성을 중수하기로 하고는 210년 업도 일대의 민공民工을 동원하고 산서의 상당에서 채석 벌목하여 수도 건설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해서 이룩된 것이 동서 7리(3,024m), 남북 5리(2,160m)의 업도북성이다. 조조는 삼국지 도시인 업성과 궁성을 보위하기 위한 방어 시설 건설에 원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신경과 공력을 들였다.

궁전과 함께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이 성의 서북에 위치한 삼대三臺의 건설이었다. 동작대銅雀臺를 가운데 두고 북의 빙정대冰井臺와 남의 금호대金虎臺가 그것이다. 동작대는 높이 10장에 100칸의 집이 지어졌고, 금호대는 높이 8장에 140여 칸의 집이, 빙정대는 높이 8장에 140여 칸의 집이 지어졌다.


그 결과,


"삼대가 우뚝 솟아 그 높이가 산과 같다"

"삼대의 견고(혹은 삼대의 험요)"


라 일컬어지는 난공불락의 인공적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동안 삼대를 구분하지 않고 동작대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잘못된 사실임)


[삼국지 조조] 업도 동작대 상상도[삼국지 조조] 업도 동작대 상상도


(업은 현재 한단시로 삼국시대 건축물 복원이 진행중)

[삼국지 조조] 업도 빙정대 상상도[삼국지 조조] 업도 빙정대 상상도


[삼국지 조조] 업성의 3대 상상도. 북쪽엔 빙정대, 남으론 금호대, 가운데 동작대[삼국지 조조] 업성의 3대 상상도. 북쪽엔 빙정대, 남으론 금호대, 가운데 동작대


[삼국지 조조] 동작대 또다른 상상도[삼국지 조조] 동작대 또다른 상상도

(출처 : 《铜雀台》场景图点击可看大图)

이 삼대는 낭만적 시인이기도 한 조조 부자가 시와 부를 지으면서 풍월을 즐기던 유락 시설인 동시에 군사적 지휘탑이었다.


특히 빙정대에는 5칸의 빙실이 있고, 실내에는 5정이 있으며, 얼음과 석탄, 곡식, 소금 등 대량의 군수품이 저장되었다. 또한, 도성의 북으로 흐르는 장수 북안에 무성을 만들어 업성과 더불어 군사적으로 의각지세犄角之勢(앞뒤에서 적을 몰아침을 은유적으로 표현)를 이룰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업성의 외면과 장수가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현무지는 대형 수군 기지였다. 이렇게 업도는 조조에 의해 난공불락의 위도(위나라 또 하나의 도읍)로 다시 태어났다.


삼대를 완성시킨 후 조조는 조비, 조식 두 아들을 데리고 이 삼대에 올라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으면서 업성의 완공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매사에 검소하기로 유명한 조조였지만 삼국지 도시인 업성의 건설에는 결코 아끼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업중기라는 책에서 업도를 


"진시황의 아방궁에 비유한 것"


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조조는 업성 밖에 몇 개의 대형 원유를 건설하였다. 방림원芳林園, 현무원玄武園, 영지원靈芝園 등이 그것이다. 그곳에 있는 죽림, 과수원, 포도원, 현무지, 조어대 등은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이들 원유와 삼대는 왕찬, 서간 등 건안칠자라 불리는 문인들과 조조 부자가 함께 엮어낸, 이른바 건안문학의 산실이었다.


[삼국지 조조] 조조, 조비 부자가 일으킨 문화 혁명, 건안문학[삼국지 조조] 조조, 조비 부자가 일으킨 문화 혁명, 건안문학


조조는 이처럼 전쟁에만 몰두한 사람이 아니었다.


미증유의 참담한 전란이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민생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덧없음을 재기횡일한 필치로 표현하는 여유로움을 보여 주었던 문인이었다. 이런 성숙한 예술 정신을 후인들은 겅안풍골이라 칭송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몸소 수많은 시와 문장을 지어낸 주역은 다름 아닌 조조였다.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낮에는 무책을 연구하고 밤에는 경전을 생각하며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부를 짓는"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새로이 시를 지어 관현에 올리면 바로 악장을 이루는"


조조의 천재적 예술성은 업도의 풍부한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한껏 발휘되었다.


출처 : 영웅 시대의 빛과 그늘 [삼국, 오호십육국시대], 박한제, 사계절

업성(업도)에 동작대를 짓고 수도로 삼은 조조 (삼국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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