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태극기 20세기 후반, 문화유산국민선택 기증유물[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태극기


20세기 후반, 문화유산국민선택 기증유물


광복조국光復祖國 김구 중명전[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광복조국光復祖國


김구(金九, 1876~1949), 20세기 초반


해서楷書 대자大字의 현판懸板으로 중후重厚한 필획과 안정安定된 결구가 돋보이는 김구의 대표작이다. 내용까지도 김구가 평생 염원하고 추구했던 '광복조국光復祖國'이라 가치가 더욱 높다. 김구는 18세에 동학에 입도 이후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본격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舛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여 

1932년 18 의봉창의거와 429 윤봉길 의거를 성공시켰고,

1940년 3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등 임시정부 주석으로 독립운동에 총력을 기울이는 도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결의 반대 운동에 앞장서면서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 정계를 영도해 나갔고,


1948년 초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정부수립방침에도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졌고 민족통일 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도산 안창호 초상 덕수궁 중명전[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도산 안창호 초상


윤봉길 초상 덕수궁 중명전[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윤봉길 초상


종오소호從吾所好 김가진 초서풍[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종오소호從吾所好


김가진(金嘉鎭, 1846~1922), 1900년경


從吾所好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좇아서 함.


초서풍草書風의 현판 글씨이다. 감가진의 필치筆致 그대로 활달豁達하고 능숙能熟하다. 김가진은 본관이 안동安東, 호는 동농東農이다. 예조판서 김응균金應均의 아들로 1895년 농상공부대신,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썼다고 전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민영환 등과 함께 격렬히 반대했다. 1908년 7월에는 대한협회 제2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친일단체 일진회를 성토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수여한 남작男爵의 작위를 즉시 반납하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포고문, 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 나창헌羅昌憲, 손영직孫永稷, 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각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간찰 이경직 명성황후 중명전[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간찰


이경직(李耕稙, 1841~1895), 1888년


1888년(무자戊子) 8월 3일 쓴 서간으로 별지 편지가 있으니 보고 불태우라는 내용이 있다. 이경직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위양威穰, 호는 신부莘夫이다.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참판 이선보李善溥의 아들이다.


1876년(고종 13)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된 뒤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등을 거쳐 189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전라도 동학교도들이 대거 상경, 교조의 신원伸寃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나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가,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8월 21일 밤에 궁궐을 습격한 일본 낭인浪人패에 항거하다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함께 살해되었다.


[덕수궁 중명전] 태극기, 김구, 안창호, 윤봉길, 김가진, 간찰

출처 : 덕수궁 중명전 특별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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