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몰락의 시작, 가남풍의 양준 제거, 흉노 석륵 봉기 [3화]

위진남북조03. 가남풍의 정권 장악, 제거된 양준 일파, 석륵의 봉기 준비


초왕 사마위(진무제 사마염의 5남)가 입경한 지 얼마 안 된 「진혜제 원강 원년(291) 4월」, 서진 황제 진혜제 사마충은 이조와 맹관이 내민 조서에 서명했다. 백치 황제 사마충은 그 내용도 잘 모른 체 서명을 닦달하는 신하의 청에 못 이겨 일단 서명부터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준을 위시한 양씨 일가가 모반을 획책했으니 이를 제압(도륙해라)하라는 내용이었다.



초왕 사마위, 진무제 사마염의 5남[초왕 사마위, 진무제 사마염의 5남]




만약 양준이 모반을 꾀했다면 양황후를 먼저 찾았거나 양씨 일가의 누구라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남풍의 정치적 술수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곧, 조서의 내용대로 서진 초왕 사마위는 사마문에 군사를 배치하고 동안공 사마요는 금군을 이끌고 가 양준을 체포하려 시도한다.


양준은 집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붙잡혔던 조상처럼 양준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취하고야 만다.


"(태부주부 주진이 말하길)이는 틀림없이 가황후가 획책했을 것입니다. 속히 사람을 보내 운룡문에 불을 지르고 크게 성세를 떨친 연후에 입궁하여 모반자를 체포하고, 다시 군사를 보내 만춘문을 열고 동궁의 병사와 외부 병사를 동원해 『황태자와 함께 입궁』토록 하십시오.


이같이 하면 궁내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해 곧바로 모반자의 목을 베어 보내며 항복할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공은 재앙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운룡문 위나라 명제 양준서진 몰락의 시작, 가남풍의 양준 제거, 흉노 석륵 봉기 [3화]



그런데도 양준은 반나절이나 고민하고 고작 이런 말을 한다.


"운룡문은 위나라 명제 때 건조한 것으로 공사비가 엄청났다. 그것을 어찌 불태울 수 있단 말인가?"


양준의 이 한마디에 그곳의 대신들은 황제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뿔뿔이 흩어졌고 양준을 도우려고 병력을 동원한 유예는 가남풍의 사촌오빠 배위의 말에 속아 스스로 병력을 해산시키고야 만다.



삼국지 조상 사마의[삼국지 조상, 우유부단함의 아이콘]



서진 경성(수도) 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양황후는 아버지의 모반 소식이 모함이라 확신하고, "태부를 구하는 자에게 상을 내린다" 라는 글을 썼으나 곧 가황후 일당에게 저지당한다. 얼마 뒤, 가황후가 보낸 금군이 양준의 집으로 들어가 마구간에 숨어 있던 양준과 동생 양요, 양제, 단광, 유예 등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수천 명을 도륙한다.


양황후는 며느리인 가남풍에게 "소첩"이라고 자신을 낮춰가며 용서를 구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폐서인이 되어 유폐된 곳에서 굶어 죽고야 만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이 막 벌어지기 이전의 상황이다. 궁중에서 벌어진 암투는 통일 왕조 진나라 몰락의 시작이었다.




이쯤에서 눈을 흉노로 돌려보자. 


이전에, 후한이 아직 (서류상으론) 멸망하지 않았던 216년, 조조는 투항한 흉노를 5부로 나눈 후 정착시켜 외적을 막게 했다. 흉노족은 이후 점차 한인과 뒤섞여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특히, 5부의 귀족들과 그 자제들은 중원에서 유교 경전과 사서로 학식을 쌓으며 한화漢 되었다.



흉노 철기병 상상도[흉노 철기병 상상도]


그러나 후조의 석륵도 그랬지만 상당 일대에 흩어져 살던 흉노의 별종인 갈족을 포함한 여러 이민족은 한족 지주(서진 한족)의 착취 속에서 하루하루 분노를 쌓아가며 살았었다.


화산이 폭발하듯 이들의 분노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 당시 5호의 발호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진나라 조정의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진무제 사마염은 손호의 오나라를 정벌하고 군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으니, 주군州郡의 군사를 해산하고 대군大郡인 경우에는 무리武吏100명, 소군은 50명을 남겨두었다.


안타깝게 가남풍 세력은 군사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서진 몰락 팔왕의 난[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개막 직전]



당시 이 조치에 대해 죽림칠현 중 한 명인 산도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중원으로 이주한 5호 vs 군비를 대폭 축소한 진무제 사마염
  2. 착취 속에 분노를 쌓은 5호 vs 사치와 향락에 빠진 진나라 조정대신
  3. 진나라 대신들의 무시를 받기 일쑤였던 5호의 자제들 vs 5호의 뛰어난 자제들을 무시하던 진나라 조정


모든 상황은 진나라 조정에 부정적이었다.




사마염에겐 아들이 26명이나 되었는데 팔왕의 난에 참가한 초왕 사마위,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처럼 영특한 아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마염은 손자 사마휼과 권신 가충의 딸인 가남풍이 사마충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으리란 큰 착각을 했다.



사마염 진나라 천하통일. 진나라 지도


애초부터 사마염은 위관의 딸을 맞아들이려 했으나 귀가 얇은 그는 흉포한 성격의 가남풍을 칭송한 곽괴(가남풍이나 곽괴나 비슷비슷)의 말에 속았고, 위관의 딸 대신 흉포한 가남풍을 태자비로 맞은 건 안 그래도 망해가는 제국의 숨통마저 옥죄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간신히 태자비가 된 가남풍은 이후에도 궁녀가 낳은 사마충의 아들을 죽여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양황후가 가충의 공훈을 내세워 두둔하는 덕택에 간신히 살아남기도 했다.



▷ 팔왕의 난에 처음으로 참여한 세 사람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다섯째 아들이자 진나라 황실의 어른에 해당.
  •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다섯째 아들로 사마충의 이복동생.
  • 동안왕東安王 사마요司馬繇 : 선제 사마의의 넷째 아들인 사마주의 셋째 아들.



가남풍 폐후 가씨 서진 황후[폐후 가씨, 사마충 아내이자 양준을 몰락시킨 정치가]




양준 일파를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서진의 세 왕은 입조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사마량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1,081명을 후작으로 삼는 등 상을 남발했다가 되려 사람들의 마음을 잃는다. 게다가 조카뻘인 동안왕 사마요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문앙 일가를 멸족시키거나 마음대로 황명을 꾸몄기에 곧 대방군에 안치된다. (훗날 사마영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한 명의 왕이 이탈하자 곧 사마량과 사마위의 알력 다툼이 벌어진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위진남북조03. 가남풍의 정권 장악, 제거된 양준 일파, 석륵의 봉기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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