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애종 자결과 여진족 나라 멸망, 몽고와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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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종의 자결로 끝난 금나라의 역사 (여진족 황제의 나라)


■ 금나라 멸망 직전, 도망가는 애종과 최립의 반란

천흥 원년(1232) 2월에 금나라 군대는 동관을 버리고 허주의 군사들이 병변을 일으켜 몽고에 항복했으며, 노씨와 휴주와 중경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3월에 몽고는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는 동시에 조병문과 공원조 등 스물일곱 명과 항복한 사람들의 가족을 요구했다. 금나라 애종은 조왕 완안와가를 인질로 삼고 사자를 보내 화친을 의논했다. 7월에 금군이 몽고의 의화사 당경을 죽이고 화의를 중단하자 몽고군은 더욱 세차게 성을 공격했다.


금나라 애종 금애종 여진족[금나라 애종] 마지막 황제


변경이 포위되고 수개월이 지나자 창고가 비게 되었다.


  • 여름이 되자 전염병까지 유행해 60일 동안에 여러 문을 통해 『죽어 나온 자가 90여 만 명』이고, 여기에 빈곤해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자들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 10월에는 명령을 내려 민간에 비축한 양식을 수색하면서 한 사람당 세 말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관부에서 가져가는데, 만일 방해하면 곤장을 때리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위로는 친왕이나 후비의 가족부터 아래로는 홀아비와 과부 및 빈곤한 사람들도 모두 예외일 수 없고 무고하게 살해된 사람도 있을 정도여서 크게 민심을 잃었다.


12월에 애종은 동쪽을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변경을 벗어나 도주하면서 우승상이며 추밀사이자 좌부원수인 완안새불 등에게 수행하게 하고, 와안노신과 습날아불을 추밀부사와 참지정사로 삼아 도성을 지키게 했다.


"방어하는 두 신하는 본래 어리석고 계책이 없어 다만 문을 닫고 지키는 것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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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되의 가격이 은으로 두 냥으로서 빈민들을 이따금 사람의 시체를 먹었고 죽은 사람들이 연이어 보였다. 관부에서는 날마나 성을 나가는 마차의 수를 기록하는데, 하룻밤이면 그 고기를 조금도 남김없이 모두 잘라 먹는다. 많은 관리 집안의 사람들도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민간에서는 그들의 자식』을 먹는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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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날마다 말과 소 같은 탈것들을 죽여 스스로 먹고, 상자나 말의 안장 및말다래 등 모든 가죽으로 만든 물건에 이르기까지 무릇 먹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삶아서 먹었다.


그 귀한 가문의 주택이나 무릇 저자에 화려한 집들의 목재는 모두 거두어 불을 땠다. 성 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기와와 벽돌의 폐허로서 이전의 번화하고 화려한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성안에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 것과 같이 아침은 그런대로 지내지만 저녁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날마다 동쪽으로 정벌을 나간 애종이 승리했다는 소식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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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정월에 애종이 사자를 보내 『태후와 황후 및 여러 비빈』을 맞이하려고 했으나 몽고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인심은 더욱 불안해지고 관원이나 사서인 가운데 성을 탈출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도모하는 이들도 있었고, 형왕을 옹립해 성을 가지고 몽고에 항복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두 지비정관은 써볼 만한 계책이 하나도 없어 사서인들은 실망하고 날마다 어떤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경서서면원수 최립이 변경을 방어하는 두 신하를 죽이고 위소왕의 아들 양왕 종각을 옹립해 감국으로 삼고는 스스로 몽고 군영으로 가서 항복을 청했다.


아울러 명령을 내려 여러 군사에게 약속하기를


"백성에게서 1전을 빼앗아도 사형에 처한다"


라고 하자 사서인들은 한가닥 활로가 생겼다고 다행스러워했다. 그러나 최립은 결코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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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태사와 군마도원수 겸 상서령과 정왕이 되어 사사로이 개봉부 창고의 재물을 취하고 도성의 금은을 수탈했다. 태후, 황후와 여러 비빈, 여러 왕과 종실을 몽고 군영을 보냈고, 또한 백관들에게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 공적을 찬양해야 한다고 넌지시 일러 관민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가 천흥 3년 6월에 부장 이백연에게 피살되었다.




■ 금나라 채주성이 함락되다.

애종은 성을 나와 진류와 기현을 지나 황릉강에 머물렀다. 천흥 2년(1234) 정월에 황하를 건너 북쪽에 있는 위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해 다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귀덕에 이르렀다.


6월에는 귀덕을 떠나 채주로 달아나서 근시를 파견해 무선을 불러 원병으로 보내라고 했다. 무선은 송의 금주를 취하고 다시 애종을 받들어 촉으로 가려고 할 뿐 제때에 채주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다.



몽고 원나라 금나라 남송 고려 지도[여진족 황제 나라 멸망] 몽고 금나라 송나라 고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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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포위가 풀어지면서 몽고는 여러 차례 남송으로 사자를 보내 군사를 연합해 금을 멸망시키기로 약속했다. 8월에 몽고와 송의 협의가 체결되었는데 『금을 멸망시킨 후에 하남의 땅』을 송에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송과 몽고의 연합군이 당주와 식주를 공격했고, 무선의 군대가 석천에서 붕괴되어 금의 애종이 서쪽으로 달아나 촉으로 들어가는 길도 끊겼다. 9월에 몽고군은 긴 보루를 쌓으면서 채주를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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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송의 장수 맹공이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30만 석의 양식으로 원군을 보내 군사를 연합해 채주를 포위

 12월

 몽고군이 연강을 터뜨리고 송의 군사들이 시담수를 끌어들여 여수로 들어가게 하고는 땔감과 풀을 깔아 길을 만들어 채주성 아래로 공격


3년 정월에 송의 군사가 남문을 공격해 격파하고, 몽고군은 서문으로 들어갔다. 금의 애종은 종실이자 채주동면 원수인 승린에게 황제를 전위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승린이 출전했다가 전투 중에 죽고 금은 멸망했다.


애종의 자결로 끝난 금나라의 역사 (여진족 황제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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