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장사왕 사마예는 1백여의 선봉대를 이끌고 진혜제를 손안에 넣은 뒤 제왕 사마경을 공격했다.


제왕 사마경은 : "장사왕이 조서를 멋대로 고쳤다."

장사왕 사마예는 : "대사마 제왕이 모반했다."


라고 서로를 모함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너무 많은 화살이 빗발쳐 어전으로도 유시가 들어왔고 몇몇 군신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팔왕의난 5호의 발호위진남북조 시대 서진 팔왕의 난


이런 격렬한 사흘간의 전투 끝에 제왕 사마경은 휘하의 장사 조연에게 체포돼 궁 안으로 보내졌다. 혜제는 복위에 힘쓴 그를 살려주고자 했으나 사마예는 사마경을 죽이고야 만다.


이내 평화가 다시 찾아오려나 싶었으나 사소한 이유로 장사 이함이 사마예에게 죽임을 당하자 하간왕 사마옹은 성도왕 사마영과 반년만에 다시 거병한다.


성도왕 사마영 업성성도왕 사마영, 업성을 떠나지 않음

  • 제왕 사마경 - 무제 사마염의 동생인 사마유의 아들 (혜제의 사촌형)
  • 성도왕 사마영 - 무제 사마염의 여섯째 아들 (혜제의 이복동생)
  • 하간왕 사마옹 - 선제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부의 손자 (혜제의 당숙)




사마옹은 권력욕이 강했고, 사마영은 임지인 업에서 조정을 원격 제어하길 원했고, 사마예는 이 둘이 탐탁치 않았다.


하간왕 사마옹은 7만의 군사, 성도왕 사마영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 북에서 낙양을 포위했다. 사마영은 속전속결을 원해 곧장 낙양으로 진격했으나 사마예는 진혜제의 깃발을 이용해 성도왕 사마영의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후 일방적인 도륙을 자행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 낸다.


건춘문에서 7리에 걸친 도랑에 시체가 쌓여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진혜제만큼 무능했던 촉한의 유선진혜제만큼 무능했던 촉한의 유선


당시 강남에서 중원으로 이주한 명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육기와 육운 형제도 이때 사망한다. 하교에서 패전한 뒤, 노지에게 참소당하여 주살되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렇다.


"화정華亭의 학鶴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도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육기가 하북도독으로 있을 때, 군대의 뿔피리 소리를 듣고, 손승에게 화정의 학 울음소리만 못하다는 말을 했었기에 죽기 전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만약 그전에 고영과 대약은 등의 말을 듣고 동오로 돌아갔다면 이런 환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중에서 목이 베이는 모욕을 당하진 않았을텐데. 아무튼, 시간은 사마예의 편이 아니었다.


낙양을 둘러싼 포위군 때문에 성안의 양식이 날로 줄어들었고 성 밖의 두 왕은 병력이 계속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이내 동해왕 사마월은 사마예를 밧줄로 묶은 뒤 사마예의 관작을 박탈하고 성도왕 사마영에게 정사를 일임하는 조서를 발표했다.


동해왕 사마월. 사마의 동생인 사마규의 아들인 사마태의 차남동해왕 사마월. 사마의 동생인 사마규의 아들인 사마태의 차남


이윽고 성문이 열리자 성안의 사마예 군사들은 뜻밖에 성밖의 군대가 많지 않음을 깨닫고 사마예를 구출해 낸 뒤 사마영에게 저항하려 하였다.


 사마월은 정세가 이상하게 흐르자 장방을 이용해 사마예를 죽이도록 만든다.

 사마예는 장작더미 위에서 산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마예를 제압한 사마영은 승상에 임명됐다.

 사마월은 상서령이 되었다.


사마영은 측근인 장령 석초를 낙양의 열두 성문을 수비케 했으며 의심 가는 자는 가차 없이 제거했다. 이어 제왕 사마경이 옹립한 황태자 사마담은 청하왕으로 삼고 사마영이 황태제가 되었다.

그러나 제후왕의 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아직도???). 사마영은 그 위세가 대단했으나 사마영은 그 이전보다 더 교만하고 사치스러워졌기에 사마월은 자립을 꾀하게 된 것이다.




영흥 원년(304) 가을, 군사를 투입해 성도왕 사마영을 성토하면서 폐위된 황태자 사마담의 복위를 주장했다.


서진 황제 진나라 혜제 사마충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진나라 사마충


곧 진혜제를 모시고 북정北征에 나선다는 핑계로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업성』으로 갔다. 석초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업성으로 달려가자 사마영은 석초에게 5만을 내주며 영격토록했다.


탕음에서 석초를 만난 사마월은 대파했고 진혜제는 얼굴에 칼자국이 나고 몸에 세 발의 화살을 맞아 피가 낭자했다. 백관들이 모두 도망간 와중에 시중 혜소만이 황제를 보호했으나 혜소는 사마영의 병사들에게 칼로 난자당했다.


"오직 폐하 한 사람만 범하지 않도록 한 황태제의 명을 받드는 것입니다."


얼마 후 사마영의 책사 노지가 풀숲에 쭈그려 앉아 통곡하는 진혜제를 업성으로 데려갔다.




이때 천하엔 또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5호의 발호가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 동양이란 사관은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낙양성 동북쪽 보광리에서 토지가 함몰되었는데, 그 속에 두 마리의 거위가 있었습니다. 푸른 거위는 날아오르고 하얀 거위는 날지 못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탄식하며) 옛날 주周나라 때 회맹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곳 적천狄泉이다.


갑자기 두 마리의 거위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푸른 거위는 호족胡을 상징하는 것이요, 나중에 반드시 호족이 낙양에 침입하게 될 조짐이며, 하얀 거위가 날지 못한다는 것은 국가에 불길한 일이 있을 조짐일세."


제후 왕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와중에 사천 지방엔 성한이 세워졌고 북방엔 도독유주제군사 왕준이 독립 세력을 구성했다.


흉노 유연 사마월 사마영서진 말기 북방의 독립 세력


사마월이 낙양을 떠나 업으로 향할 때 『하간왕 사마옹은 낙양을 점령』한 상태였고 왕준은 선비족, 오환족의 기병에 사마월의 동생인 동영공 사마등과 업성을 향해 진공했다. 사마영은 왕초 등을 파견했으나 연전연패였다.


북방 오랑캐의 진공 소식에 업성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책사 노지는 낙양으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사마영과 생모 정태비는 업성에 미련이 남아 미적거렸고 갑사 1만5천은 아무런 계책이 없는 사마영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고작 수십 기만 대동한 채로 사마옹의 부하 장방이 지키는 낙양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사마영 사마월 업성 전투사마영 vs 사마월. 다음 편에서 소개


 성도왕 사마영 압박하는 동해왕 사마월, 업으로 끌려간 진혜제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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