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
- 한중일 역사/위진남북조 100화
- 2019. 3. 25.
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
잔혹했던 왕준은 업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으며 선비족 사병들이 약탈한 부녀가 행군에 걸림돌이 되자 역수에 밀어 넣어 모두 죽였다. 이때 죽은 자만 8천여 명에 달한다고 했으니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의 기병에 대한 공포가 천하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낙양을 점거했던 장방 또한 매우 교만했다. 낙양 일대를 약탈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후궁과 궁녀들을 겁탈하거나 황실의 귀중품을 훔치기도 했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 진회제 사마치
결정적으로 진혜제를 압박해 사마영의 황태제 신분을 폐하고 예장왕 사마치를 황태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리게 했으며 함부로 장안 천도를 거행했다.
진혜제의 형제는 25명이었으나 이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사마영과 사마치, 오왕 사마안 밖에 없었다.
진혜제 영흥 2년(305) 7월, 차근차근 힘을 다시 모은 동해왕 사마월은 장방과 하간왕 사마옹의 행태를 성토하며 각지에 토벌의 격문을 돌렸다. 산동과 하북 일대에서 군사가 일어나자 사마옹은 두려워한 나머지 연금 상태의 사마영을 진군대장군에 봉한 뒤 하북 일대를 다독이게 했다. 그럼에도 동해왕 사마월의 군세는 심상치 않았다.
사마옹은 사마월과 강화할 생각이었으나 장방은 황제를 함부로 대했기에 두 왕이 강화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 생각해 강화에 극렬히 반대했다.
사마옹은 장방의 옛 친구 질보를 이용해 목을 쳤고, 이를 조건으로 삼아 사마월의 군대를 물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마월은 계속 진격했고 이듬해인 영흥 3년(306) 5월에 사마월의 장군 기홍에게 패해 태백산 안으로 피신하는 처지가 된다.
장안을 함락한 사마월 휘하의 선비족 기병들은 장안 일대를 약탈하며 2만여 명을 살육했다. 낙양으로 돌아온 사마월은 대군을 낙양에 진주시키고 녹상서사가 되었다.
사촌형 범양왕 사마효를 사공으로 삼아 업성에 주둔시키고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자립한 것이나 다름없는 왕준에게는 성도왕 사마영 토벌의 공으로 표기대장군, 도독동이하북제군사 및 유주자사에 임명했다. 당시 하북의 성도왕 사마영은 동해왕을 피해 도망치려다 사마효에게 붙잡혀 업성의 감옥에 갇힌다.
사마효는 진혜제의 동생인 그를 해칠 생각이 없었으나 갑자기 병사했고 휘하의 장사 유여는 사마영이 업에서 다시 일어설까 두려워 거짓 조서를 꾸민 뒤 뒤에서 목을 졸라 그를 죽였다. 사마영의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
광희 원년(306) 12월, 동해왕 사마월은 진혜제의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독이 든 떡을 먹여 살해한다. 곧 스물다섯 번째 동생인 사마치를 보위에 올리니 .... 그가 그 유명한 "영가永嘉의 난"으로 희생된 진 회제이다.
사마월은 장안에 주둔 중인 사마옹에게도 조서를 보내 사도로 임명하니 낙양으로 입성할 것을 요구한다. 사마옹은 만년을 평안히 살 생각에 곧장 낙양으로 향했지만 사마월의 친동생인 남양왕 사마모가 미리 보내 사람들에게 살해된다. 세 아들과 함께.
이어 제왕 사마경에 의해 황태자가 되었던 청하왕 사마담과 진 회제의 외숙 왕연, 대신 고도, 대신 구희를 조정에서 쫓아내거나 죽였다. 조정을 완전히 자신이 틀어쥐었다.
위진남북조 팔왕의 난 - 상호 협력 관계
(녹색 - 협력 관계)
(주황색 - 연합 관계)
(빨간색 - 보위 순서)
(검은색 - 화살표가 보이는 곳이 죽은 사람. 화살표 시작점이 죽인 사람)
이쯤에서 당시 정세를 살펴보자.
장사왕 사마예를 제압한 성도왕 사마영 시기에 흉노족 유연이 세운 한나라가 존재했다(304년 10월 건국). 사마월은 바로 유연의 부하인 석륵을 토벌해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했다.
사마월은 4만의 정병으로 출병하면서 사방에 격문을 돌렸지만 모두 시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다다른 그때 진 회제가 구희 등에게 밀조를 내려 자신을 제거하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마월은 돌연 폭질로 사망했다.
함께 토벌에 나선 양양왕 사마범과 태위 왕연은 발상하지 않은 채 군사를 이끌고 그의 시신을 봉지인 동해로 옮기고자 했다.
낙양에 머물던 사마월의 부장 하륜 등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사마월의 세자와 왕비 배씨 등을 이끌고 동해 방향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석륵의 기병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던 그들은 학살을 당했다. 석륵의 기병들은 사냥하듯 서진의 군민 수십만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고 사망자만 무려 10만에 이르렀다.
이때 죽음을 피한 20여만 명은 유연의 부장 왕장이 놓은 불더미 속에서 모두 불타 죽었고 이들의 살점은 군량으로 사용됐다. 세자와 황족 48명이 사망했고 사마월의 왕비 배씨는 윤간당한 뒤 노예로 팔렸다. (영가의 난)
왕연은 청담을 논하는 당대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으나 이전에 동생인 왕징이 지적했듯 현실적인 정치 감각은 매우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형님은 겉으로는 무위지도無爲之道를 터득하고 계신 듯합니다만 정신적으로는 그 기능이 너무 둔하십니다."
왕연은 숙부 왕징을 천하의 명사로 떠받들었으나 왕연의 아들 왕현은 왕징을 존중하지 않았다.
종일토록 터무니없는 말만 하는 명사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애초에 왕연은 삼공의 지위를 얻고선 직무에 관여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은 명교를 논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상서랑 이하는 직무를 유기하고 팔짱을 끼며 청담을 논하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서진 왕연 태위
왕연의 현실 감각이나 정치를 대하는 태도가 사치로 물든 서진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왕연은 석륵에게 죽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만약 공담空談을 숭상하지만 않았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 근대 역사가 리궈원
왕연은 문인이면서 저서 한 권 없었고, 유명인이나 대표하는 논리가 없었으며, 관리이면서 공적이 없었다. 딱히 칭찬할 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당대의 지식인 계층은 천박한 무리가 아니면 왕연에게 제대로 속아 넘어간 무리다.
낭야 왕씨라는 귀족 가문 태생이었고, 왕융, 왕징, 왕돈, 왕도와 사촌지간으로 당시 요직을 차지하거나 높은 권세를 자랑했던 이들이 그의 양 날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남을 속이기에 쉬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당시 낙양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인근을 지킬 병사를 포함해 군민 수십만이 이 지역을 빠져나갔음에도 진회제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북쪽 흉노의 한나라, 장안 서쪽의 저족, 강족, 사천의 성한이 존재했기에 제후왕들도 임지를 지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학살이 일어난 지 두 달 후. 사방이 포위된 낙양에선 밖으로 나갈 배 한 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회제는 한나라 군사에 포획됐다가 2년 뒤 피살된다. 진혜제의 조카인 진민제 사마업이 장안에서 보위를 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영가 6년(311), 낙양이 함락당하며 진회제가 포로로 잡히는 순간 통일 왕조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제 시대는 서진을 넘어 남북조로 향한다. 남쪽의 동진과 북쪽의 16국이다.
비극적인 황제 사마충 사마치, 서진 멸망과 영가의 난 [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