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


광초 2년(319) 여름, 유요는 조서를 내린다.


"나의 선조는 북방에서 일어났다. 광문제(유연)가 한나라 종묘를 세워 백성의 뜻을 좇았다. 지금 의당 국호를 바꾸고 선우를 선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호를 조로 바꾼 이후 진창, 초벽, 안정, 농성 등을 함락시키고 관중의 파족, 저족, 강족, 갈족 등을 제압했으며 태학과 소학을 세워 학자들 밑에서 수업을 받도록 했고, 궁실을 너무 크게 짓는 것이 옳지 않다 여겨 중단하기도 했다.


현명하게 내실을 다지던 유요는 광초 8년(325), 드디어 석륵의 조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시작한다.



후조 조나라 석륵 명제후조 조나라 석륵 명제




석륵이 장수 석타에게 명해 상군을 쳐 3천여 명의 포로와 소와 양 등 가축 2만여 두를 빼앗은 것이다. 유요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안에서 출병해 하빈에서 석타와 갑사 1천 5백의 수급을 얻었으며 5천여 명의 후조 군사를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이후에도 몇 번의 패전이 있었지만, 전황은 유요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광초 11년(328) 6월, 석륵이 조카 중산공 석호에게 하동을 공략케 했으나, 유요의 대군을 보고 도주했다. 유요는 이를 추격해 9월엔 고수에서 접전을 벌여 석호에게 대패를 안긴다. 대장 석첨이 피살되고 시체가 2백여 리에 걸쳐 쌓였다.


여세를 몰아 낙양의 금용성을 치자 형양 태수 윤구, 야왕 태수 장진 등이 성을 들어 항복해왔으나 유요는 어찌 된 일인지 낙양을 함락시키질 않았다. 잇단 승리에 교만해져 전략을 짜지 않고 대영에서 술을 마시며 도박을 했다.


석륵도 호락호락 당할 인물은 아니었다.


"유요가 한번 이긴 승세에 올라타 낙양을 포위했다. 용렬한 자들은 그의 예봉을 꺾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도 백 일이 넘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정병을 이끌고 가 단번에 그를 사로잡아 올 것이다."


광초 12년(329), 1월 후조의 보명 6만과 기병 2만7천이 성고에 집결했다. 군졸들의 입에 나무 막대기를 물린 다음 빠르게 진군해 황하를 건너 낙양을 포위한 전조의 유요군을 향해 달렸다.



흉노족 한나라 전조 멸망, 갈족 석륵 및 조카 석호의 평양성 [16화]위진남북조 시대 갈족 흉노족



유요는 금용성에서 철군해 낙양 서쪽에 포진했으나 패착이었다.


"너희들은 나에게 축하의 말을 해도 좋을 것이다!"


석륵은 4만의 보기를 이끌고 낙양으로 입성했으며 석호의 3만 보병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석감과 석총은 각기 기병 8천으로 서쪽에서 북쪽으로 질주해 유요의 선봉을 협격했다.


술을 좋아하던 유요는 당시에도 만취한 채로 말에 올라탔다가 패병 속에서 말이 쓰러지며 후조의 군사에 포획 당하고야 말았다. 당시 후조의 군사 5만여 가 죽었다. 유요는 곧 석륵의 앞에 끌려갔다.



석륵(후조)의 초기 활동지석륵(후조)의 초기 활동지


유요가 석륵에게 인사했다.


"석왕, 일찍이 중문에서 맺은 맹서(영가 4년(310), 서진을 공격할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가?"


"오늘의 일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다른 얘기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석륵은 유요를 양국의 영풍에 있는 작은 성에 연금하며 상처를 치료하고 기첩을 넣어 주는 등 잘 대우하면서 엄히 감시했다. 그리고 장안성에서 여전히 농성 중인 황태자 유희에게 투항을 권하는 서신을 보내도록 하였으나 곧 화를 내며 목을 쳤다.


"여러 대신과 함께 사직을 바로 세워라. 나로 인해 뜻을 바꿔서는 안 된다."


유요가 죽자 장안의 유희와 남양왕 유윤 등이 크게 두려워하며 진주로 철수하려 했다. 상서 호훈 등이 만류했지만 결국 상규로 달아났고, 얼마 안 되어 너무 쉽게 장안성을 내준 것을 후회했다.



갈족 기병 부대갈족 기병 부대



되려 다음 달인 태화 2년(329), 9월엔 장안성 공격에 나선다.


당시 농동, 무도, 안정, 신평, 북지, 부풍, 시평 등지에선 유희와 유윤에게 호응했다. 유윤이 장안 밖에 영채를 세웠지만, 석호의 정예 기병 2만 명에게 대패해 상규로 달아났다.


그러나 상규에서 아군을 받아들이기 전, 석호의 기병이 먼저 들어가 전조의 왕후장상을 일망타진한다. 유요의 황태자 유희와 유윤을 비롯해 포로가 된 왕공과 장령이 모두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석호는 이들을 모두 도륙했다.


이어 5개 군에 거주하는 흉노 도각 부락의 각 귀족과 전에 포로가 된 전조의 왕공 5천여 명을 낙양으로 압송해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유연으로부터 시작한 한과 전조는 모두 3명의 황제가 재위한 끝에 27년 만에 완전히 멸망했다.


중원에 거주했던 흉노 도각 부락 사람들 역시 석륵의 명에 의해 모두 도살됐다. 이전의 근준이 평양성에서도 흉노족을 도살했으니 중원에는 더는 흉노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갈족 석륵 석호위진남북조 시대 갈족 흉노족



  • 진회제 영가 2년(308), 유연이 칭제하면서 석륵을 지절, 평동대장군, 평진왕에 봉했다.




석륵의 원래 이름은 복륵蔔勒으로 갈족 출신이며, 조부가 야혁어로 불린것으로 보아 대대로 부락의 수령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중원으로 이주해서는 노예와 다름없이 저녁 늦게까지 밭에서 일했다.


진혜제 태안 연간인 302-303년 어간에 병주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석륵과 같은 호인들은 돈으로 매매가 되었다. 이후 석륵은 목숨을 건 도망을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농기구를 뾰족하게 갈아 무기로 만들어 약탈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무안 일대의 급상에게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웠고 업성에서 성도왕 사마영의 군대와 대적할 정도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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