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연주자사 구희에게 대패해 유연에게 몸을 맡겼으니 석륵이 큰 인물이라 판단한 유연은 그에게 장군의 직을 내렸고 전장터에서 공을 세우기를 10여 년, 마침내 노예 출신으로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석륵은 유연의 한나라 휘하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으나 처음부터 독립할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망을 쌓는 데도 주력했다. 약탈은 물론이고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절대 금했으며 기주를 함락한 뒤에는 군자영을 세워 문인들을 길러냈다. 석륵의 수하였던 장빈도 이런 군자영에 스스로 찾아간 인물이었다.



장빈 일러스트장빈 일러스트





유총이 황제가 되자 석륵은 다시 정동대장군, 병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유총의 아들 유찬과 낙양을 칠 때, 양양으로 진격해 장강과 한수 이북의 거점을 얻어냈다. 독립한 이후 근거지로 삼을 요량이었는데 모사 장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으로 진격하다 낭야왕 사마예의 반격에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사마예에게 패배하고 나서야 하북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부견에게 왕맹이 있어서 하북을 통일했다면, 석륵에겐 장빈이 있었기에 이후, 관중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진회제 영가 5년(311) 4월, 동해왕 사마월이 급사하자 무능한 왕연 등은 도망치듯 동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석륵은 밤낮으로 달려 그들의 추격에 성공하여 20여만 명을 몰살시키고 태위 왕연을 비롯해 양양왕 사마범 등 6명의 왕과 수십 명의 고관을 포로로 잡았다.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위진남북조 시대 갈족 이민족 역사


사서엔 석륵의 어린 시절에 왕연이 범상치 않다 여겨 죽이려 했다거나, 낙양에서 둘이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대대로 고관의 자리를 차지하던 『명문 왕씨와 호족 노예』가 함께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명문 왕씨를 대표하는 왕연이 노예 출신인 석륵의 앞에 끌려갔다.


왕연은 석륵에게 칭제 할 것을 권유하며 비위를 맞추려 했으나 대로한 석륵은 되려 왕연을 벽돌집에 가둔 뒤 벽을 무너뜨려 죽인다. 투항하지 않는 고관들을 되레 살려주며 잘 대했으니, 어째 하는 행동이 전진의 부견과 비슷했다. 석륵은 이때 아주 커다란 공을 세웠고, 7월엔 유요와 함께 낙양을 함락시켜 진나라 황제를 사로잡았다.


  • 한 달 후엔 예장왕 사마단이 장안에서 즉위하자 중신 구희와 양하에서 맞붙어 사로잡은 뒤 죽였다.


왕연 일러스트. 자는 이보왕연 일러스트. 자는 이보


이런 석륵에게 걸림돌이 있었으니 바로 대장군 왕미였다. 석륵과는 전혀 다르게 청백리로 이름 높은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장성한 이후엔 사대부 출신 도적으로 영천, 여남, 양성 등을 약탈했으며 세력이 커지자 낙양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낙양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대부분 병력을 잃자 유연에게 투항한 것이었다.

  • 왕미도 석륵과 같이 가는 곳마다 승전보를 울렸으나 그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약탈과 무분별한 살인을 즐겼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낙양 점령 이후에 유요가 왕미의 아문장 왕연延의 목을 베어가며 이를 말렸을까. 당시 왕미의 병력은 아문장 왕연이 유요에게 죽자 유요의 군대와 싸우기도 했었다. 이렇게까지 왕미는 안하무인인 사대부 출신 장군이었다.


유연의 한나라는 태생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출발했다. 석륵과 왕미의 세력은 유연이 황제를 칭하던 그 당시에도 이미 너무 커진 상태였고, 한나라가 직접 다스리는 영역보다 이 둘의 관할 영역이 더 넓었다.


하나의 왕조 안에 3개의 왕조가 존재한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이후 흑심을 먼저 드러낸 건 왕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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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함락 후 그곳에 불을 질러 모든 걸 태워버린 유요에게 실망한 왕미는 마침내 독립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는데 첫 행동은 석륵에게 많은 미녀와 보물을 바치며 우호를 원했다. 


"공이 구희(석륵에게 잡힌지 한 달만에 살해됨)를 사로잡아 왼팔로 쓴다고 하니 저는 공의 오른팔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면 가히 천하를 평정할 만합니다."


이에 석륵은 장빈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왕미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이처럼 겸허한 말을 쓰니 이는 필시 나를 도모하려는 뜻이다!"


석륵은 『왕미의 의도』를 알아차렸으나 마음을 다스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왕미가 걸활군(기황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구하는 군민 혼합의 군대) 수령 진오, 지방의 소규모 군벌 유서와 접전을 펼치자 석륵에게 구원군을 청한 것이다.


부견의 왕맹과도 같았던 석륵의 장빈부견의 왕맹과도 같았던 석륵의 장빈


장빈이 간했다.


"장군은 매번 왕미를 없앨 기회가 없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지금이 바로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진오는 소인배에 불과하니 우려할 바가 못 됩니다. 반면 왕미는 인걸이니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


석륵은 장빈의 말을 쫓아 유서를 급습해 수급을 왕미에게 바쳤고 이는 대성공이었다. 왕미는 석륵과 우호를 다졌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진회제 영가 5년(311) 말, 석륵이 왕미에게 후한 예물을 전하면서 연회에 초청했다.


이미 유서의 일을 계기로 석륵을 신뢰한 왕미는 성급히 자기 진영을 떠나 석륵의 진영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환담을 했다. 그러던 중, 석륵이 몸을 일으키자 왕미는 자신에게 술을 따르려는 것으로 생각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석륵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그의 목을 쳤다.


위진남북조 왕미 일러스트위진남북조 왕미 일러스트


잠재적인 적을 일거에 제거한 석륵은 곧 유총에게 왕미가 반역을 꾀해 미리 목을 쳤다고 상서했다. 유총이 크게 화를 냈다.


"이자가 멋대로 행동하니 이는 군주를 우습게 여기는 짓이다!"


그러나 유총에겐 석륵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되려 진동대장군에 임명하고 『병주와 유주의 군사』를 독찰하고, 병주자사를 겸하게 했다. 왕미의 세력까지 흡수한 석륵은 남쪽 동진의 수도 건업을 차지할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에 예주의 여러 군을 약탈해 마초와 군수 물자를 확보하고 갈피에 주둔했다.


곡창 지대인 강회 일대(일반적으로 회수 일대의 농경지를 의미)를 점령하여 풍족한 의식을 꾸밀 수 있었다.


갈족 석륵, 위진남북조 시대에 왕미 세력을 흡수한 사건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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