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이후 대인배 석륵은 금군 소대장인 한족 풍저가 실수로 갈족을 갈호羯胡라 부른 것에 대해 익숙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고, 참군 번원이 몇 년 전 갈족에게 도둑맞아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하자 오히려 의복과 돈을 하사했다. 


석륵이 노예 시절에 상당 지역에서 연못물을 놓고 『자주 다투었던 이양』이란 사람에겐 과거의 감정을 잊고 참군도위에 임명하는 등 동진의 조적과도 화친을 요청하며 국가 내부의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북조의 5호 16국 황제 중 드문 성군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맹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증명할 일화도 있다.


한나라의 명신 역이기[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한나라의 명신 역이기


한번은 한서 강독 시간에 유방의 참모 역이기가 유방에게 6국의 후예를 찾아 왕으로 옹립하는 방안을 건의한 대목을 듣다가 매우 놀라 말했다(이 발언의 내용은 몇 가지 존재).


  1. "만일 그같이 하면 어찌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단 말인가?"
  2. "이 방법은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야. 어찌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오?"
  3. "그 서생의 말을 듣고 어찌하여 천하를 통일했단 말인가?"

강독을 하던 유생이 곧이어 장량이 간한 대목을 얘기하자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히도 장량이 잘 지적해 주었구나!"


이렇게 내치에 힘쓰며 병력도 강화하던 석륵은 동진 원제 태흥 4년(321), 유주를 공격해 평정하고 이듬해 2월엔 조카 석호가 진나라 장수 서감을 죽이고 연주와 서주를 판도에 넣었다.


323년엔 청주를 평정하고 324년엔 하비, 동해, 팽성을 얻었으며, 325년 6월엔 석생이 낙양을 점거한 뒤 동진의 사주자사 이구를 쳤다. 이에 이구 등은 전조의 유요에게 투항한다. 이에 후조에선 추격군을 꾸려 공격했지만, 맹진과 석량에서 잇달아 패배하며 기세가 꺾이게 된다.


그러나, 석륵에겐 오랜 시간 전장터에서 경험을 쌓은 조카 석호가 있었다.


328년 5호16국시대 지도[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328년 5호16국시대 지도


당시 중산공에 봉해졌던 석호는 4만의 보기를 이끌고 전조의 중산왕 유악과 낙수에서 대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뒀으며 물러나 석량에 주둔하던 전조의 군대를 마저 물리쳐 장령 80여 명을 포로로 잡고 1만여 명을 갱살했다.


석호의 이 승리로 후조의 영역은 회하 일대까지 확장된다. 형주로 진격할 루트가 새롭게 마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견 석호 모에화 일본[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부견 석호 모에화


동진 성제 함화 3년(328), 석륵이 낙양을 포위한 전조의 유요를 향한 진격을 개시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전편에서 다뤘다.


유요를 격파한 석륵은 330년 연호를 태화라 정하고 대조천왕을 자칭하며 실질적인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다. 성군의 자질이 있던 석륵은 칭제한 이후에도 특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이미 회하 이북, 동쪽으론 황해, 서쪽으론 하서, 북쪽으론 연과 대에 이르는 대영토를 다스리는데 열정을 다한다.

사방으로 순행하고 백성에게 노상을 권장하고 『조세를 낮춰』 조조의 위나라 이래 가장 가벼운 세금을 부담시켰다.


또한, 교육 제도 확립에 주의를 기울여 책사 장빈 같은 한족들도 크게 등용했으니 북조의 16국 중 최고의 성군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다. 이전에 석륵이 조왕을 칭할 당시 책사 장빈이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내가 대사를 이루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나를 두고 이처럼 일찍 우후를 데려갈 수 있단 말인가?"


이후 그는 모사 서광, 정하 등과 대사를 의논했지만 늘 우후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우후가 나를 버려 이런 자들과 일을 논하게 하니 참으로 가혹하지 않은가?" 석륵에겐 또 하나 걱정거리가 있었다.


후조 동진 성나라 대나라 지도[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여느 왕조처럼 후계자에 대한 문제였다. 태자 석홍은 어려서부터 유가 경전을 배워 학식과 예절이 뛰어나 문신과의 교류가 많을 뿐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크게 떨어졌다. 석륵은 이게 우려스러워 서광에게 이런 말을 했다. "태자가 문약하니 장군 가문의 자제답지 않은 듯하오!" 


서광이 대답했다.


"한고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취했고, 한문제는 현목으로 천하를 지켰습니다. 성인의 후예가 이와 같은 것은 하늘의 도입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한고조와 문제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폭군 석호 후조 황제[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서광, 서하, 정하 등이 간곡히 중산왕 석호를 죽일 것을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마씨의 강동은 팔다리의 작은 질병에 불과합니다. 중산왕 석호는 포학하고 간사한 자입니다. 근일 연회에서 황태자를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폐하가 그를 용인하고 있으니 폐하의 만년지후에 종묘에 형극이 돋아날까 걱정입니다. 이자는 폐하의 심복에 있는 큰 우환이니 응당 조기에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 석륵은 끝까지 조카 석호를 믿었다.... 동진 성제 함화 7년(333) 8월


석륵이 중병에 걸리자 석호가 병사들을 이끌고 입궁해 질병 시중을 들었다. 실제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기에 먼저 손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처럼 석호는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후조 황제[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과 후조 황제 [19화]]


이전에 석륵은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적국이 변방을 침공할까 우려해 제후왕들에게 변경 방비에 힘쓰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나 석호는 변경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진왕 석굉, 팽성왕 석감 등이 훗날 거병할까 두려워 이들에게 입궁해 병시중을 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나마 정신을 차린 석륵의 눈에 진왕 석굉이 들어왔다. 석륵은 매우 놀라 이런 말을 했다.


"누가 너를 입경케 했는가? 만일 누가 입경토록 했다면 즉시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도록 하라."


석호는 매우 놀라 잠시 입경한 것이라 둘러대곤 이들을 경성에 연금시켰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석륵 입장에선 이들이 봉지로 돌아갔는지 연금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황위를 노리는 석호, 세상을 떠난 석륵 장빈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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