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인구와 영토, 당나라 백제 낙랑군과 전투

고구려 인구와 영토, 당나라 백제 낙랑군과 전투


고구려 인구1. 당나라, 백제 공격과 연정토 투항 (영토 크기)


출처 :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 이옥, 1984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둘레는 2,000리이며 이 안에 30,000호가 살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구당서 권 199 상, 고구려에는 7세기 중엽 고구려에 697,000호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 백제 공격과 연정토 투항 (영토 크기)




이 왕국이 7세기 동안 영토를 상당히 확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영토는 5세기 말경에는 북으로 농안, 남으로는 충청도, 서로는 요하, 동으로는 동해까지 뻗쳤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총인구수가 구당서에 전해지는 만큼 많았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한 호가 보통 4인에서 5인 정도로 구성된다.


위의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의 인구는 15만에서 300만 이상으로 증가한 것이 된다. 백제에는 76만호, 즉 380만명, 신라에는 수도인 경주에만 178,936호, 즉 약 90만명이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숫자들은 명백히 과장된 것이며 여기서 고구려와 신라에 관한 호戶란 명名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오래전에 "고구려 민족 형성과 사회"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 후 많은 시일이 흘러 그동안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어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앞에 적은 결론이 너무나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생각되어 이를 수정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학자들이 언급을 회피하거나, 혹은 지나친 과장을 하는 경향이 있다. 후자의 경우 그 대표적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구당서 권 83 설인귀전에 '자부여천(중?)중 40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신구당서에 668년 9월 고구려가 멸망할 때 5부 176성, 697,000호가 있었다고 하였다.


... 176성이란 곧 주, 군급 고을들의 총수라고 인정되며 또 70만호란 과호로서 실지 자연호는 2~3배 정도, 즉 200만호(약 1,000만명)가 되겠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과장은 도를 지나쳐 고구려를 평양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마저 부리게 한다.



당나라, 백제 공격과 연정토 투항



다시 말하면 삼국유사 권 1, 고구려에 "고구려가 가장 성했을 때 인구가 210,508호가 있었다"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국내성, 평양성, 남평양성 등에는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평양에는 고구려가 강성할 때, 210,508호가 살았다고 하며(삼국유사 권1, 고구려) 남평양(신원군)에도 그 도시 유적의 크기로 보아 10만 안팎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 사료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고구려가 망할 때 그 나라에 697,000호가 있었다고 한 구당서는 이 나라에 성城이 176개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약 350만의 주민이 200개도 안 되는 성의 군사적 보호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하나의 성이 보호해야 할 주민의 수에 관한 문제를 검토해 보자.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당나라의 이적이 요동도해군대총관이 되어 ... 고구려를 치니, 귀한 신분을 가진 고구려의 연정토가 열두 개의 성, 763호(로 나누어진), 3543구의 사람을 이끌고 투항했다.


이를 보면 한 성이 보호해야 할 호의 수는 약 65로, 4~5명이 한 호를 구성하고 있었으니 성 하나가 보호할 사람의 수는 약 300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로는 인구의 수를 알아볼 수 없다.



당나라, 백제 공격과 연정토 투항 (영토 크기)] 안악궁과 외성


  • 삼국사기에 "왕이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빼앗았고 200인을 포로로 잡았다."라는 기사가 있는가 하면,
  • 통전에는 "4월에 이적이 개무성을 점령하고 20,000명을 포로로 하였다"하고
  • 삼국사기에 요동성을 당나라 군대에게 빼앗길 때 죽은 자가 10,000명이 넘고, 잡힌 군인이 또 10,000명, 일반 남녀가 40,000, 빼앗긴 양곡이 500,000이라 하여


성의 크기에 따라 그에 따르는 사람의 수가 다르니 성의 수로 인구를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다시 위지동이전(권30, 고구려)로 돌아가 나라의 둘레가 2,000리이며 인구가 30,000호라는 기사를 분석해 보자. 2,000리의 둘레는 800km로 그 면적은 40,000km2가 된다. 이 땅에 15만명이 살고 있었음을 뜻한다.



[한국사 공부] 고구려 영토와 인구


1km2에 1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554년에 편찬된 위서 권100, 고구려와 629년경에 쓰인 북사 권94, 고구려, 그리고 636년에 편찬된 수서 권81, 고려에는 고구려의 인구가 3배로 늘고 그 나라의 땅은 동서로 2,000리, 남북으로 1,000리가 좀 넘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는 7세기 중엽에 동서로 2,000리, 남북으로 1,000리, 다시 말하면 800km * 400km가 되니 총면적은 320,000km2가 된다. (한반도의 총면적은 220,000km2이다). 따라서 면적이 위지동이전에 적힌 수치보다 8배로, 인구는 3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인구2. 영토와 요동군, 낙랑군 인구, 역산법

이 계산은 고구려의 인구가 6세기 중엽에 3만호 * 3배 = 9만호, 9만호 * 4.5명 = 약 40만명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구려가 지배하던 영토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까? 적어도 남북 1,000여리란 너무 의도적으로 축소된 것이 아닐까?


구당서 권 199 하, 고려에는 이 영토가 동서로 3,100리, 남북으로 2,000리라 했으니 인구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약 100km2로 거의 한반도의 다섯 배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이 숫자는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 동삼성, 즉 만주의 총면적이 겨우 80km2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위서 권2, 태조와 북사 권1, 소성황제의 원흥 1년 정월에 고구려의 기술자 36만명과 백제도공 10만여명을 경사로 옮겼다는 것과 같이 과장된 표현이다.


인구 문제를 더 깊이 규명하기 위해 우선 압록강 이북, 즉 만주에 있던 고구려 영토에 관한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우선 서기 1세기 초에 쓰인


한서의 "동이의 예군남려 등이 280,000명을 이끌고 투항하여 (이 땅을) 창해군으로 했다."


[한국사 공부] 고구려 영토와 인구


는 기록과 같은 책 (권28, 지리지)에 나오는 호구에 관한 숫자(요서군 : 72,654호, 352,325구, 요동군 : 55,972호, 272,539구, 현도군 : 45,006호, 221,845구; 낙랑군 : 62,812호, 406,748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서기 1세기 전후에 남만주와 낙랑에 약 100만의 인구(요서를 합치면 135만명)가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서기 5세기에 편찬된 후한서(권23, 군국지)에는 요서에 72,654호, 352,325구, 요동에 64,128호, 81,714구, 현도에 1,594호, 43,163구, 낙랑에 61,492호, 257,050구가 있다고 되어 있다.


즉, 같은 지역에 총 734,252명이 살고 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한서의 통계에 비해 622,366, 즉 약 60만이 준 것으로 된다.


고구려 인구와 영토, 당나라 백제 낙랑군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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