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석민 등의 한족은 호인들은 이들이 나가봐야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 되리라 판단하고 살호령을 내린다. 한족 장병들이 호인들을 도륙해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업성 인근 지에서의 도륙까지 합치면 그 수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또한 이전에 기주 일대로 강제로 이주당한 수백만의 호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서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으며 굶주림과 병으로 쓰러졌다.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열에 두셋에 지나지 않았으며 들에는 시체가 가득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살호령에 격분해 여음왕 석곤이 태위 장거 등과 업성을 공격했으나 무예가 뛰어난 석민과 이농의 반격으로 패퇴하고 되려 대장 장하도 등을 잃게 된다.




태녕 2년(350), 석감과 주변 태감들이 은밀히 외부와 연락하자 석민은 석감을 비롯한 업성의 석씨 일가를 모조리 도륙한다.


이로 인해 석륵이 칭제한 328년부터 석감이 살해당한 350년까지 고작 23년 만에 후조는 완전히 멸망한다.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후조 멸망, 염위 건국



뛰어난 건국자의 뒤를 이은 폭군과 폭군의 무지한 아들들이 짧은 시간 동안 나라를 망친 것이다.


석감이 죽자 후조의 황위는 빈자리가 되었다. 이농과 석민이 서로 보위를 미루자 석민이 이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진나라 사람』이다. 지금 진나라 황실이 아직 존재하니 우리는 제군들과 함께 각지를 나눠 진나라 천자를 낙양으로 봉환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어찌 생각하는가?"


상서 호목이 말했다.


"폐하의 성덕이 하늘에 부응하고 있으니 응당 보위에 올라야 합니다. 진나라 황실은 이미 쇠미해져 멀리 강표(강동)로 쫓겨 가 있으니 어찌 군웅들을 제어해 사해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인 지적이었기에 석민은 이를 받아들여 보위에 오른다.


국호를 위魏로 정하고 염지를 황태자, 이농을 태재, 제왕으로 봉했으며 자신의 성도 염으로 다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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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은 생전에 걸활군을 깨뜨리며 포로로 잡은 장령 중 염첨이란 자를 의붓아들로 삼았다.


염첨의 아들 염민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염첨이 진중에서 병사하자 석륵은 염민을 손자로 삼으며 성을 석으로 삼도록 했었다. 염민은 석륵의 양손자로 전장에서 계속해서 공을 세웠고 양독의 반란을 제압하며 명성을 떨쳤었다.


그렇지만 당시 상황은 염민의 위나라(이하 염민)에게 불리했다. 애초 업성에서 호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까닭에 옛 후조의 수도인 양국의 석지가 석감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올라 후조의 황제를 칭하자 인근 호인들이 그에게 호응한 것이다.


  • 게다가 후조의 영향력이 사라진 지역에선 각지의 군벌들이 서로 다투는 양상까지 일어났다.



민족영웅 염민 동상[후조 멸망, 염위 건국] 민족영웅 염민



강족의 수령 요익중은 저족의 포홍에게 선제공격을 가했으나 역공을 맞아 대패했고 포홍은 이 승리를 기반으로 대선우, 삼진왕三秦王을 칭했다.


선비족의 모용준도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국가 건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유주와 계주를 스리슬쩍 차지한다.


석민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내부 단속을 위해 이농과 상서령 왕막, 시중 왕연, 중상시 엄진과 조승 등을 제거하며 황위를 강화했다. 또한 동진에 국서를 보내 북벌할 것을 부추겼지만, 국서의 내용이 교만하고 이미 칭제했기에 동진에선 이를 무시한다.


석민은 장수로선 훌륭했으나 황제로선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고 외교력도 크게 떨어져 염민이 빠르게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살호령을 내렸던 염민[후조 멸망, 염위 건국] 살호령을 내렸던 염민




연녕 원년(350) 8월, 석지가 후조의 보위를 이은 지 다섯 달째 되는 달, 상국 석곤과 진남대장군 유국에게 10만의 장병으로 업성 공략을 명하지만 대패했고, 얼마 후 2차 업성 공격에서도 대패해서 되려 염민의 위세만 커졌다.


이에 염민은 승리에 도취해 교만해진 나머지 무리하게 후조의 수도 양국을 공격한다. 양국의 석지가 선비족 모용준과 강족의 요익중에게 원군을 청한 것을 알았음에도 무리하게 공성전을 벌이다 협격을 당해 간신히 10여 기를 이끌고 업성으로 도주한다.


이 와중에 염민의 아들 염윤이 이끄는 호인의 군사들은 염윤을 포박하여 석지에게 항복한다. 염윤은 큰 기둥에서 온몸이 해체되는 끔찍한 살인을 당한다. 상황이 반전되자 후조의 석지가 되려 욕심을 부린다. 『대장 유현』에게 병사 7만으로 업성을 치게 한 것이다.



염민 일러스트[후조 멸망, 염위 건국] 일러스트



유현은 업성의 왕태와 미리 도모할 것을 모의했고 염민이 패배의 후유증으로 업성에서 방어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왕태의 동태를 파악해 놨던 염민은 곧장 영격에 나서 유현의 병사 3만여의 수급을 얻는 대승을 거둔다.


왕태의 일족을 비롯해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신료들의 목도 베어냈다. 이전에 유현은 퇴각하는 길에 염민에게 서신을 보내 추격하지 않고 양국으로 돌아갈 길을 터주면 석지의 목을 베어 바치겠다고 약조했었다.


실제로 유현은 전황을 보고하는 틈에 석지와 대신 10여 명의 목을 베어 염민에게 보냈고 염민은 그를 상대장군, 대선우에 봉했으니 후조는 석지의 영녕 2년(351) 4월, 멸망한다.


갈족 살호령을 내린 염민, 위나라 세우고 후조 멸망시키다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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