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영흥 2년(305) 봄, 서진의 장군인 진민이 강남에서 할거할 뜻을 밝히며 강남 호족의 호응을 요구하자 중원에서 무시를 받던 오군의 명족 고씨顧 일가를 비롯한 대다수가 찬동한다. 그렇지만 진민은 정치력도 없고 서진 정부가 점차 역적과 함께한다며 의심을 하자 진민을 영가 원년(307)에 제거한다.


이후에도 강회의 장창, 광릉의 전회의 난 등을 제압한 당시 강남 호족들의 상호 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 경쟁적인 성격이 강했기에 유유의 송나라 이후론 통합 세력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가문조차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대략 저 동네가 당시의 온주와 태주대략 저 동네가 당시의 온주와 태주



영가 원년(307), 사마월은 사마예를 진동대장군, 도독, 양주 강주 호주 교주 광주, 오주제군사로 삼으며 건업을 지키게 하니, 사마예는 기회의 땅 강동으로 진입한다. 왕도, 형주자사 왕징, 양주자사 왕돈을 위시한 낭야 왕씨 일가의 지원을 받으며 고영, 하순 등의 명사를 불러들이고 손필, 두선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동진 정권의 기틀도 마련한다.


처음, 강남 호족들은 사마예를 선봉으로 삼아 조정의 대군이 몰려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사마예를 비롯한 강남 이주 세력들이 강남 호족의 원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마예를 추대하게 된 것이다.


왕씨 일가는 강남 호족들의 내부 반목 요소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건업과 가깝지 않은 형주와 양주의 관직을 택한 건 장차 강남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영가 영흥 동진 위진남북조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사마예 건국





영가 4년(310), 강남의 대호족 주씨 일가의 주기周玘는 망명해 온 중원의 무리가 높은 지위를 독차지하고 자신과 같은 강남 호족들의 위에 올라선 것에 큰 불만을 가진 채 사망한다. 병사하기 직전 아들 주협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를 죽인 것은 중원에서 온 놈들이다. 너희가 꼭 복수해다오."


이후 언급할 314년의 반란은 강남 호족들에 대한 차별이 불러온 좋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영가 5년(311), 영가의 난으로 임기의 왕씨, 태원 왕씨, 영천 유씨, 고평 치씨, 진군 사씨, 초국 환씨 등의 명문가들이 강남으로 속속 이주했고 사마예는 이들 중 현능한 자들을 뽑아 기용했다.


당시 왕도는 106연撚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인재를 보좌관으로 등용했다. 강남 호족들도 등용하였지만, 대다수는 북방인들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권을 이끌어 갔으며, 한편으론 강남 호족 간의 사회적 평가로 인한 상호 분열 요소를 적극적으로 건드려 강남 호족 간의 분열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대성공이었다.



동진 위진남북조 영역동진 후조 전조 성한 영역





서진의 마지막 연호인 건흥 2년(314), 사실 사마예는 강동 일대의 호족들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왕씨 일가와 같은 이주 집단을 크게 기용했다. 실질적인 권한은 강동의 호족들에게 내주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는 원제의 즉위 초 명문 주씨의 일족 중 하나인 주기의 모반 모의로 이어진다.


원제는 강동 호족이 부담스러워 주기의 모반을 모른 체하며 건무장군, 남군사마에 임명했으나 대를 이은 아들 주협이 병마를 모아 거병한다.


그러나 주협의 숙부 주례는 성공 가능성이 작아 빠르게 의흥 태수 공간에게 고변했고 주협 역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군사적 움직임은 멈췄다.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중국 강남 호족 위세, 위진남북조 시대


동진 원제 사마예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북쪽에서 내려온 세족들은 점차 온주와 태주 일대의 광대한 지역을 개간하며 자신들의 재산으로 삼아 동진 정권의 내부 투쟁을 격화시킨다.


사실 원제 사마예 본인도 그리 큰 그릇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부 투쟁이 격해짐에도 그들을 달래는 용도로 관직과 땅을 조금 더 수여하는 방법밖에 취하질 못했다.


왕도나 왕돈 처럼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위로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초창기에 내부를 하나로 결집하지 못했기에 동진은 건국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방을 반독립 상태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수도 건강과 양주, 회수 일대만을 황제의 직접적인 통치권에 포함하는 것에 그쳤다.



동진 명사 왕도동진 명사 왕도



중원에선 진민제 사마업이 보위를 이은 후 강동의 사마예를 좌승상으로 삼았고 사마예는 피휘하여 건업의 명칭을 건강康으로 바꿨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진민제 사마업은 포로가 된 뒤 피살당했다.




ps. 예전 댓글


A1. 사실 동오의 4성 호족들과의 권력싸움은 손씨네 때부터의 유구한 전통 아닌 전통이었으니까요.


손제리도 결국 외지출신들-그러고 보니 장소, 주유, 노숙, 제갈근 등 손권의 측근 상당수가 서주와 양주 출신이네요.-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세워서 입지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칭제한 다음에는 기존 강동 호족들을 중용하긴 했지만 여차하면 싹 제거-육손의 분사라든가 이궁의 변이라든가-하는 강수 두는데 망설임이 없었고 말입니다.


A2. 말씀처럼 이궁의 변만 보더라도 삼오 일대의 강남 호족들의 입지가 너무 탄탄했습니다.


너무 탄탄하니 황제 입장에선 너무 깨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 수밖에요.


참으로 유구한 전통이긴 한데... 이런 호족들을 젖히고 지방 권력을 차지한 건 황제의 종친들이었으니 어쩌면 강남의 혼란은 처음부터 없어질 수 없었던 것 일지도요.


강남 호족과 낭야 왕씨가 옹립한 사마예, 동진 왕도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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