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선비 우문태의 주나라(북주周) | 서위 건국 과정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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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글은 아래의 3개 자료에서 발췌.


1.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임대회 옮김

2. 위진남북조사, 이공범

3. 동북아역사재단총서, 중국 정사 외국전


우문宇文

흉노를 조상으로 하며 특히 (우문태는) 남선우의 후예이다. 본래 음산陰山 지역에 거주하였다가 1세기경 요동 일대로 이주하면서 점차 선비화 되었고, 마침내 우문선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서위를 건설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북주의 지배집단을 형성하였다.

위진남북조 3세기 후반에 이주한 이들은 유목을 주업으로 하고 수렵, 농경, 약탈을 부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종족과 혼합하여 거주하게 되었는데, 구심력이 있는 정치체제를 갖춘 우문 집단은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종종인 선비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정치적 집단세력 우문부라 할 수 있다.


이후 우문막괴가 세력을 이끌었으나 그 백성들을 학대했기에 부락 사람들이 그를 살해하고 동생 우문보발을 대인으로 삼았다. 보발이 죽자 우문구불근이 이엇고, 그가 죽자 아들 우문막외가 잇는다. 당시엔 모용선비와 대적했기에 여러 차례 모용외와 전투를 벌였다.


막외가 죽자 아들 우문손닐연이 뒤를 이어 모용외와의 전쟁을 계속 이어간다. 이후 모용한과의 전투에서 대패하는 등 전세가 불리한 와중에 세상을 떠난다. 뒤는 아들 우문걸득구가 이엇으나 불리한 전황은 나아지지 않고, 형인 우문실발퇴가 모용인에게 붙잡혀 참수된다. 부락 사람 일두귀가 걸득구를 죽이고 자립하여 모용황에 대적하나 휘하의 막흔, 섭역간 등이 피살되는 패배를 당한다. 이후 우문 선비 세력은 흩어진다.


흉노 우문부는 우문, 고막해, 거란으로 3분된다.



북주의 기반을 닦은 우문태는 자가 흑달로 선비족 무인 집안 출신이다 그의 부친 우문굉은 일찍이 6진의 반란군 중 하나인 선우수례 휘하의 장령으로 있었다. 부친 우문굉이 당하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우문태는 갈영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주영은 갈영을 격파할 때 우문태의 무용을 높이 사 장령으로 발탁했다. 우문태는 고환이 이주씨를 멸한 후 하발악의 부탁을 받고 병주로 가 군대의 허실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고환은 우문태가 8척에 달하는 장신에 상모가 비상한 것을 보고 이내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했다. 우문태가 하발악에게 돌아가 복명하겠다고 간곡히 청하자 고환은 한참 주저하다가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후회돼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 후환을 미리 없애고자 한 것이다. 관중 입구까지 쫓아갔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항우가 유방을 죽이지 못하고, 조조가 유비를 놓아주고, 환현이 유유를 용납한 것처럼 이는 호랑이를 길러 우환을 키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주는 서위의 우문태로 부터 시작되었다. 애초 우문태는 동위의 고환 보다 모든 것이 열세였다. 농업 생산력, 병력의 수, 적은 백성까지, 앞서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효율적인 군 제도로 이를 극복했다.


우문태의 세력을 뒷받침한 것 가운데, 하나는 무천진을 비롯한 북진에서 남하한 북족계 군사를 중심으로 하는 진민세력이고, 두 번째는 그에게 협력한 관중의 호족들이 이끄는 향병집단이었다.

이 향병 집단은 부병제라 불리는 군단조직으로 통합되었다. 총 24군으로 구성되고 개부開府라고 칭하는 사령관이 각각 1군을 통솔하며, 그 위에 대장군이 2명의 개부, 즉 2군을 통할하고, 그 위에 주국柱國이라고 하는 신분의 최고 사령관이 2명의 대장군, 즉 4개의 군을 지휘한다. 6주국, 12대장군, 24개부로 계열화한 것이다. 이 전체 통괄자가 승상 겸 총사령관인 우문태였다. 당시 선비계 15명, 선비화한 한인 2명 등 선비족이 그 자리 대부분을 차지했다. 


항병들은 통합된 뒤 부병으로 불리며 조세와 역역 부담을 면제받고 전사로서 필요한 말과 식량은 6가家에서 받는, 자발적인 자가 부담 형태의 병사였다. 군공에 대소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한족풍의 교양주의가 부정되어 위진남북조 대통 14년(549) 북위 효문제 이래 호족의 성을 한족의 성으로 바꿨던 것을 원래로 돌려놓았다. 이에 따라 한인 관료에게 호성을 사여하는 일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인사회가 호족화되는 경향조차 보였다.


실제로 554년에는 이러한 방향에 따라 훈공이 높은 여러 장군을 북위 건국 전의 36부족의 후예로 삼고, 다음으로 훈공이 높은 자를 북위에 귀속한 탁발부 이외의 99부족의 자손으로 간주하였다. 북주 우문태의 신임을 얻어 부각강병책을 수행한 소작이 서경의 문체를 본떠 대고大詁를 만들고 이를 공문서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것은 위진 이래의 문장을 옛날로 되돌리는 근본적인 개혁조치였다. 이 점은 556년에 공포된 6관제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다.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을 모방하여 성省을 천관, 지관, 춘관, 하관, 추관, 동관의 6개로 나눈다.


천관부 장관은 대총재로 행정을,

지관부의 장관은 대사도로 교육을,

춘관부의 장관은 대종백으로 의례를,

화관부의 장관은 대사마로 군사를,

추관부의 장관은 대사구로 형옥, 볍률을,

동관의 장관은 대사공으로 토목, 공예를 각각 관리하였다.


위 주나라 6부는 육경六卿이라 하는 육관부의 장長인 우문태가 관장한다.


서위의 6관제

관부

관명

담당임무

인명

족속

천관

대총재大冢宰

 행정

 우문태宇文泰

북족

지관

대사도大司徒

 교육

 이필李弼

한족

춘관

대종백大宗伯

 의례

 조귀趙貴

한족

하관

대사마大司馬

 군사

 독고신獨孤信

북족

추관

대사구大司寇

 형옥, 법률

 우근于謹

북족

동관

대사공大司公

 토목, 공예

 후막진숭侯莫陳崇

북족


이런 수평으로 연결되는 동료 관계를 포함하고 통솔과 종속이라고 하는 수직관계 아우르게 한 데서 이 조직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 동위(북제)가 훈귀들을 결국 충분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데 비하여, 서위(주나라)에서는 이를 주례의 옛 제도와 북족적 부족연합의 형태를 뒤섞어 훌륭하게 제도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복고풍의 경향 아래 현실의 세력관계를 살리는 원리와 제도가 여기에서 새로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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