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문제 천강 원년(566) 4월, 진나라 진문제가 사망하자 태자 진백종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진폐제이다. 진백종은 작은아버지 진욱을 표기대장군, 사도, 녹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했다.
중서사인 유사지, 상서복야 도중거, 동궁통사사인 은불녕 등은 진욱의 권세가 지나치게 비대하다고 생각해 양주로 내보내길 권했다. 진욱은 임지로 떠날 준비를 했으나 모희가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권했다. 진욱은 애초에 모반의 뜻이 없었으나 진폐제의 막료들이 심태후를 속이면서까지 자신을 사사할 것을 청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진백종이 이를 허락하자 진욱은 유사지 등을 죽이며 조정을 장악한다.
진선제 진욱 즉위 (진후주 진숙보 아버지)
진폐제 광대 2년(568) 말, 진욱이 황태후의 명으로 진폐제를 내쫓고 자신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진선제이자, 진숙보의 아버지이다.
태건 5년(573), 진나라 진선제가 북벌을 시도한다. 오명철 등은 역양, 합비, 수양 등 회남 일대를 함락한다. 이전에 북제로 망명해 북제의 파릉군왕이었던 왕림은 이때 생포되어 목이 베인다. 당시 북제는 황족들의 난으로 내정이 어지러웠고 북주는 막 서위를 대신해 들어섰기에 상황이 매우 유리했었으나, 북주가 북제를 멸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태건 9년(577), 서주와 연주를 놓고 북주와 전투를 계속했다.
태건 10년(578) 봄, 오명철 등이 수만의 군사로 팽성을 공격하지만 청구에서 대패해 포로로만 3~4만 명이 잡힌다. 얼마 후 회남 일대는 다시 북주의 소유가 되었으니 진의 운명도 풍전등화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북주의 우문옹이 병사하고 망나니 태자 우문빈이 즉위해 진의 수명도 조금 연장되었다.
태건 14년(582) 2월, 진나라 진선제 진욱이 사망하고 태자 진숙보가 즉위하니 그가 진후주다. 진혜제 영녕 원년인 301년, 회남왕 사마륜이 선양을 압박한 지도 280년이 지났다. 통일 왕조 수나라의 등장도 멀지 않았다.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 즉위
30세의 진후주 진숙보가 아버지 진욱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진욱이 중병에 걸려있을 때, 병을 간호하던 진숙보, 진숙릉, 진숙견 형제 중 진숙릉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시흥왕 진숙릉은 기회를 틈타 마침 땅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는 진숙보의 목을 칼로 마구 찔렀으나 칼날이 무디었던 까닭에 진숙보는 혼절만 했다.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던 장사왕 진숙견은 진숙릉을 제압하고 허리띠를 풀러 진숙릉을 내전의 기둥에 묶었다.
이전에 진숙릉은 강주, 영주, 진주 등 3개 군의 군사권을 맡았고, 평남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해 태건 10년(578)엔 동부에서 국정을 총괄하는 일인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이후로 매우 교만해졌고 생모인 팽씨가 세상을 떠날 땐, 동진의 태부인 사안의 묘를 파내고 그곳에 어머니를 묻기도 했다.
진숙보의 목을 찌를 당시 그는 29세였다.
가까스로 도망쳐 죄인들을 무장시켜 대적했으나 이내 패배하고 수나라에 투항하려 했으나 장수 소마가에게 제압당해 그의 아들을 비롯한 일가가 주살된다. 그전에 파헤쳐졌던 사안의 묘도 복원되고 그의 친모 팽씨의 해골은 밖으로 뿌려졌다. 보위에 오른 진숙보는 목의 상처 때문에 정사를 돌볼 수 없었고 조정 대사는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 양주자사, 진숙견이 맡았으나 진나라 권력에 취한 진숙견은 이내 교만해졌다.
사치를 시작하는 진후주 진숙보
진후주 지덕 원년(583), 강주자사로 임명되어 건강을 떠나게 되지만,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던 진숙보는 임명직인 사공에 봉하고 건강에 연금시키며 그의 죄를 찾았는지 만들어냈는지 하여간에 그것으로 그를 압박한다. 진후주 진숙보는 그를 옥에 가둔 뒤 사사하려 했으나 사면령을 내려 그를 살려준다.
"주상의 총애를 얻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신이 지금 나라의 기강을 범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이후로 진숙견은 진나라가 망하고 장안으로 끌려가 부인과 술집을 차릴 때까지 조용히 살았다. 시간이 지나자 목의 상처가 아물어 갔고 진숙보는 기뻐하며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진선제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대신 모희는 연회 자리를 떠났다. 진후주 진숙보는 술에서 깨어난 후 기분이 나빠 모희를 작은 지방의 관장으로 내보냈다.
진숙보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2년에 걸쳐 광조전 앞에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이란 거대 누각을 지었다. 이후 진나라 정사를 돌보는 데 권태를 느껴 백관의 상주문은 매번 두 명의 태감에게 맡겼다. 문장가로선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태감에게 정사를 맡기고 10여 명의 미희와 시부와 가무를 즐기며 살았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끝을 알리는 진숙보. 이 연재도 끝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