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 및 겁쟁이 선조실록 기록 (1593년 2월 5일)

벽제관 전투 및 겁쟁이 선조실록 기록 (1593년 2월 5일)


명나라 군대 벽제관전투명나라 군대 벽제관전투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선조실록 1593년 2월 5일 (벽제관전투 22일 전)


선조실록 - 접대도감 보고


“남방 군사의 천호千戶 오유산이 징발로 말하기를


'지난달 27일에 관군(이여송의 명나라 군대)이 귀국 초병哨兵의 허튼 보고에 속아 왜적은 이미 물러가고 경기 지방은 텅 비었으려니 생각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었다. 그런데 왜적이 미리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길이 끊기고 포위당하여 습격을 받았다. (벽제관전투 패배도 사실 정보력의 패배임)

그리하여 왜적을 참수하기는 겨우 1백 20여 명 했는데, 대국 군사의 사상자는 1천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제독 이여송은 지금 임진강 가에 머물고 있는데 눈이 저렇게 내리니 반드시 개성으로 후퇴하여 주둔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장수가 죽은 것은 14명인데 성명은 아직 모르겠고, 우리 군사 가운데는 사상자가 하나도 없다’ 고 하였습니다.”


경기도는 비어있다고 누군가 거짓 보고를 한 것입니다. 가능성은 3가지입니다.


  1. 초병이 경기도를 가보지 않고 거짓말
  2. 초병이 다른 누구의 거짓말에 속음
  3. 왜군이 많으면 명군이 멈출까 봐 일부러 거짓말


명나라 이여송 벽제관전투명나라 이여송 벽제관전투


선조실록 - 사간원 건의


“평양성을 평정한 뒤부터 큰 나라 군사가 파죽지세로 전진하였으나 성공을 하지 못한 것은 단지 마초와 군량을 계속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호조판서 이성중은 시종 이 업무를 담당하면서 전하의 지시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일 처리에 재능이 부족하여 미리 조처하지 못하였고, 일이 급하게 되어서야 직접 감독하겠다고 요청하였지만, 운반을 독촉한 보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 조선 군대 총진군

평양성 전투의 승리를 승리로 조선군에는 총진군령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선조는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명령이 전달되지 않아, 승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는 해산되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벽제관전투도 선조의 소극적인 행동이 문제였습니다.


선조실록 - 비변사 건의


“지금 이덕형의 장계를 보니, 김응서는 자기의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군량과 말먹이를 운반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고서도 지금까지 1섬도 도착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 장수가 명을 따르지 않음이 이렇게도 심하니 매우 통분하옵니다.”


여기서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임진 전쟁 벽제관 전투임진 전쟁 벽제관 전투



행재소가 전투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김응서는 곡식을 운반했음에도 안 했다고 알려져 억울하게 탄핵당합니다.


선조실록 - 비변사 건의


“도원수 김명원의 장계를 보니, 이 제독이 벽제(벽제관전투 지점, 고양시 덕양구)에 갔다가 두 파총이 희생당하자 동파로 물러나 뒤따라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수로서 따라간 사람은 고언백 등 몇 명뿐입니다.


김응서는 싸움을 잘하는 용맹한 장수인데 애당초 원수가 순찰할 때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김응서가 수하의 친병 약간 명을 거느리고 제독의 군대보다 앞서가서 협력하여 적을 소탕하게 하라고 이원익에게 지시를 내려 그가 잘 헤아려 처리하게 하소서.”



명나라 이여송 명나라 제독명나라 이여송 명나라 제독



비변사에서 같은 날 전혀 다른 건의를 올립니다. 한쪽에선 김응서를 탄핵하라, 한쪽에선 김응서의 친병을 전투에 참여하게 하라. 아마도 군사정보가 얽히고설켜 당시 관료들도 헷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벽제관전투 때도 마찬가지죠.


선조실록 - 비변사 건의


“전날 제독이 평양에 있을 때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국왕이 만약 안주로 온다면 여러 신하는 반드시 모두 마음을 쓸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곳에 머물러 계시다가 동쪽으로 나가는 길에 적들이 꽉 들어차게 된다면 그 근심은 더욱 커질 것이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제독의 의견에 따라 빨리 앞으로 나아가시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 겁쟁이 조선왕 선조

겁쟁이 선조는 일본 가토 군대가 무서워 이여송의 남진을 거부합니다.


선조실록 - 이여송 제독은 10일 밤에 개성부로 들어가 그곳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은銀 100냥과 쌀 100섬을 내어 장세작을 시켜 나누어 주어 구제하게 하고, 패문(공문)으로 유정의 군사에게 진군할 것을 독촉하였다.


이여송은 평양을 회복하고 후방을 안정하려 노력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벽제관전투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 벽제관전투 임진왜란



선조, 광해군이 아니라 이여송이 했습니다.


선조실록


26일, 임진강 하류로 건너가 파주에 자리를 잡다.

27일, 아침에 이여송 제독은 수도로 가는 도로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혼자 말을 타고 벽제로 갔다.


수도에는 수만 명의 적이 있었는데, 제독은 먼저 사대수 · 조승훈이 거느리는 정예 기병 3천여 명과 우리나라의 방어사 고언백을 파견했다. 영서역 앞에서 사대수와 고언백이 군사를 풀어 급습하여 6백여 명이나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장수들은 이 일로 적을 우습게 여겼다.


-- 벽제관 전투 시작 --


적장은 선봉이 사대수에게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군을 모아 여석현 진을 쳤다. 사대수는 적병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벽제로 물러나 진을 쳤는데, 적병은 산과 들에서 압박해 왔다.

이여송은 행군하던 중 길 위에서 고언백의 군관을 만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듣고는 벽제로 달려가다가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뺨을 다쳤다.


이여송은 즉시 군사들을 지휘하여 앞으로 나가서 들에 진을 치고 신기전을 쏘았다. 한 차례의 싸움에서는 적들이 물러섰으나 이미 큰 나라 군사가 적은 것을 보았다. 좌우에서 돌격하여 중앙의 정예부대를 공격해 왔다. 큰 나라 장수들은 무기와 갑옷, 투구도 전혀 없었으므로 맨손으로 싸웠다.


제독이 수하의 날랜 장수 수십 명과 함께 직접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았으나 형세가 지탱할 수 없게 되어 군사들을 지휘하여 네 번이나 퇴각하였다. 이여송이 뒤에 서서 돌아올 때 적 3천여 명이 제독에게 육박해 왔다.



신기전 조선 벽제관전투 신기전 조선 벽제관전투



적군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마구 살상하니, 명나라 군사들은 수백이나 죽었다. 이비어와 마천총이 적에게 죽었으므로 제독은 말에서 내려 통곡하였다. 벽제관전투에서 우리나라 군량은 거의 다 산실散失되었다.


이에 앞서 이여송은 군량이 넉넉지 못하다고 해서 군사를 갈라 반은 동파에 머물러 있게 하고 반은 강을 건너게 하였다. 이때 와서 형세가 급하자 황급히 사람을 보내어 재촉해 불렀으나, 뒤에 머물러 있던 군사가 겨우 옹암을 지났을 때 앞의 군사는 이미 패했다.


적들은 혜음령까지 추격해 왔다가 대군을 보고는 고개를 넘지 못하고 도성으로 달아났다.



이여송 벽제관전투 1593년이여송 벽제관전투 1593년



명나라 군사는 멀리서 오느라고 지쳤고, 또 말들이 돌림병에 걸려 군마 1만 2천여 필이 죽었으며, 벽제관전투에서 패하자 사상자도 많았다. 얼마 후에 청정이 함경도로부터 돌아와 수도에 진을 합쳤으므로 적의 기세가 더욱 왕성해졌다. 이 때문에 제독은 다시 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겁쟁이 선조가 행재소에서 관망하고 있을 때, 명나라 이여송은 돈을 풀어 후방을 안정시키고 전투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군마 1만 2천 필이나 죽을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죠. 이 시점에서 이여송의 부대는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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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전투 및 겁쟁이 선조실록 기록 (1593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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