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측천 첩여 서혜 사이의 우정 - 당태종 시기 측천무후

14세(637년)에 황궁에 들어온 무측천은 입궁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황제 당태종을 가까이서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온종일 액정궁의 태감들로부터 황궁의 규칙과 예의, 용어를 배우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측천무후로선 황제의 눈에 들어 관등에 오르기 전에는 이 고단한 삶이 개선될 여지가 없었다. 무측천의 주위에는 황제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늙은 궁녀들이, 어떻게 황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부지기수였다. 유력한 집안의 딸이거나 재물을 써서 힘 있는 태감이나 궁녀를 매수하지 않고서는 수많은 궁녀를 제치고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요원했다.

14세의 무측천은 일반 소녀는 구경도 하기 힘든 황궁에 후궁으로 뽑혀 들어와 장밋빛 미래에 한껏 부풀었었지만, 이내 황궁의 냉혹하고 지엄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은 당 고조 이연의 관리로, 당 제국이 세워질 무렵 고조 이연에게 충성을 다했었다. 무사확은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무측천의 어머니인 양씨와 재혼했다.


양씨는 딸 셋을 낳았는데, 큰딸 한국부인은 훗날 측천무후의 남편인 고종 이치와 스캔들을 일으킨 인물이고 둘째 딸이 무측천이었다. 무사확은 무측천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후 무측천 모녀는 무사확의 첫째 부인이 낳은 아들들에게 천시를 받으며 함께 살았었다.


무측천 서혜 당태종 성은중국 역사, 당나라 초중기


입궁하는 무측천

그 무렵 무측천의 미모에 대하여 들은 당태종이 직접 명하여 무측천을 입궁시키고 재인(궁정의 여가 관리로, 비빈의 등급 중 하나)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측천무후은 집안 형편상 사가의 도움을 받을 처지도 되지 못했고 막 들어온 새내기 후궁으로서 힘도 재물도 없었으므로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중국의 황제는 보통 약 3천 명의 후궁을 거느렸다고 한다. 수나라 양제가 후궁 6만 명, 당나라 현종이 1만 명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의 당태종 이세민도 수천에서 1만에 가까운 후궁을 두었을 것이다.


중국 황제가 통상 3천 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가정할 때 황제가 매일 밤 한 명의 후궁과 동침을 한다면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차례가 돌아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3천 명의 후궁 중에 황제의 성은을 입어 품계를 받는 여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후궁들은 갖가지 이유로 품계를 받은 여성들이었는데, 가장 낮은 19등급 채녀菜女부터 1등급 귀비貴妃까지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등급이 낮은 후궁들은 법적으로 한 달에 9명씩 하루를 배정받아 황제와 함께 밤을 보낼 기회가 있었지만, 등급이 없는 여성들은 그나마도 황제의 얼굴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황제의 침실 스케줄은 매우 바빴고 황제가 소화하기에는 후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무측천은 16등급 재인으로 낮은 신분에 속했으므로,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 전에는 황제와의 관계를 갖기가 어려웠다.


무측천 당태종 이세민중국 역사, 당나라 초중기


서혜를 동경하는 무측천

막막한 생활 속에서 무측천은 비슷한 또래의 서혜徐惠라는 궁녀를 무척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조용한 성품을 가졌으며, 측천무후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문학에 조예가 깊고 학식이 높아 궁녀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정의 유력한 관리였기 때문에, 또래의 궁녀 중에서 당태종 이세민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도와줄만한 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래서 더욱 서혜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고, 의자매 관계라도 맺고 싶어했다. 서혜가 황제에게 사랑을 받으면 자신을 황제에게 천거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뼛속까지 귀족인 서혜의 까다로운 성미를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장안의 고고한 귀족 집안에서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서혜의 풍모를 측천무후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먼저 무측천은 재미있는 문제를 만들어 서혜에게 가지고 갔다.


지식이 출중하고 지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서혜에게 자주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서혜의 소녀적 자만심을 충족시켜 주면서 둘은 차츰 친해지기 시작했다. 삭막한 궁중에서 단짝이 된 두 사람은 곧 의자매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무측천은 앞으로 둘 중에 누가 먼저 황제의 총애를 받더라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영원히 갈라서지 않을 것을 맹세하자고 했고, 서혜도 승낙했다. 황제의 총애를 먼저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황제에게 천거하기로 했으며, 서로 도와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측천의 예상대로 서혜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무측천은 그 소식을 듣자 걷잡을 수 없이 흥분되었으며 뛸 듯이 기뻤다. 이제 서혜가 황제의 사랑을 받는 동안 무측천은 황제와의 만남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서혜를 기다리는 무측천

기대감에 들뜬 날들이 여러 날 지나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서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측천무후는 초조해하면서도 자신을 갈고닦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태종 무측천 서혜 총애중국 역사, 당나라 초중기



무측천은 날이 갈수록 서혜가 자신을 잊은 것이 아닐까 하여 불안감이 커졌고, 믿음은 점점 실망으로 변해갔다. 무측천은 불안한 마음에 기다리지 못하고 한 태감에게 부탁하여 서혜에게 호소력 있는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소식을 주지 않던 서혜는 곧 답장을 보내왔다. 서혜는 측천무후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당태종 이세민은 서혜의 뛰어난 재능에 매료되어 그녀를 첩여(14등급)로 봉했고, 서혜의 거처도 따로 마련해 주었었다.


황제를 가까이 모시게 된 서혜는 무측천을 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황제로부터 전갈이 왔다. 서혜가 만들어준 기회가 드디어 무측천에게 온 것이었다. 무측천은 이 한 번의 만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실수하면 다시는 황제를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당태종 시기, 황제 측천무후 - 첩여 서혜 사이 우정중국 역사, 당나라 초중기




측천무후(무미랑)의 아버지 무사확은 559년생이었고 어머니 양씨는 579년생이었는데 그들이 결혼했을 당시 620년에서 622년 경으로 당시 아버지 무사확은 만60세를 넘긴 홀아비였고 어머니 양씨는 만40대 초반을 넘긴 노처녀였다.


그리고 슬하에 딸만 셋을 낳았는데 큰딸을 낳았을때 어머니 양씨부인은 만44세였고 둘째딸 무미랑을 낳았을때 만45세였으니 지금기준으로도 엄청난 늦둥이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 무사확이 무미랑이 11세때 만76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50대후반을 넘긴 늙은어머니와 세딸은 무사확의 본처소생의 두아들 이른바 무미랑에게는 이복오빠 두명에게 괄시를 받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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